5월 5일(부활 3주일) 배반의 상처와 치유
베드로, 참 인간적이고 순수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예수님의 첫째 제자요 수제자라지만 복음서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그런 칭호들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따라 자신도 그렇게 하게 해달라고 했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겁을 먹어 물속에 가라앉자 이번에는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 비유 말씀이 이해가 안 가면 용감하게(?) 그 뜻을 설명해달라고 청했다.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금방 고백해놓고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듣고서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했다가 예수님께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어느 날은 함께 지내는 형제들이 정말 미웠는지 그들을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고 예수님께 하소연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그의 인간적인 약점들이 드러나는 이야기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찌 보면 예수님의 으뜸 제자라고 불리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스캔들을 복음서는 그대로 전한다. 결정적으로 그는 스승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다.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고 설령 자신이 죽게 되더라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는 스승님의 예언대로 부인했고 또 그런 자신을 두고 슬피 울었다. 그의 언행으로는 수제자가 될 만한 지혜로움이나 듬직함을 찾기 어렵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기저기에서 이렇게 저렇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돌아가셨던 분이 되살아오셨으니, 단 한 번의 만남만으로도 제자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기에 충분할 것 같은데 그게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그렇지, 사람이 그렇게 쉽게 안 변하지. 아무리 하느님이라도 사람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실 수 없나 보다. 그래도 제자들은 조금씩 변해갔다. 베드로는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주님이 오셨다는 말에 그 많은 물고기를 버리고 첨벙 물속으로 뛰어들어 주님께로 달려갔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주님 앞에 나아가려니 알몸으로 나설 수는 없어 서둘러 겉옷만 대충 걸치고 그대로 달려갔다. 주님을 만난다는 기쁨이 세 번씩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했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넘어서게 했을 것이다. 역시 그다운 행동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모닥불을 피워 아침 준비를 해놓으셨다. 그리고 그 모닥불 앞에서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고, 이에 베드로는 역시 그답게 거침없이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뻔뻔하게 어떻게 저런 대답을 할 수 있냐고 비난할 수 있다. 바로 얼마 전에 모닥불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딱 잡아 떼놓고서는 이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똑같은 상황 속에서 그런 질문으로 그를 아프게 하신다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 그의 상처를 치유해주시는 것이라고 보는 게 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께 어울리는 해석이다. 그는 배반의 상처를 사랑의 눈물로 씻었다(요한 21,17).
자신에 대한 이상과 현실은 참 다르다. 이러저러한 선하고 거룩한 결심들을 하지만 자주, 아니 매 번 그 약속을 어긴다. 이렇게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니 똑같은 결심을 하는 것이 어렵고 때로는 더 선해지고 거룩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숨어버리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맞다, 그것은 유혹이다. 내가 그런 줄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신다. 그리고 주님은 그런 나, 초라하고 유치한 나를 사랑하신다. 아침 밥상까지 차려주시고, 가장 아팠고 부끄러운 그 상황을 재현하면서까지 베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신 분이 나의 주님,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언제나 그렇듯이 희망은 나의 지혜로움이나 굳건한 의지가 아니라 초라하고 유치한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의 양떼들을 잘 돌보라고 말씀하셨다. 특별한 의식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잘 돌봄이 내 배반의 상처를 치유해줄 거라고 가르쳐주시는 것 같다.
부활하신 주님, 피하실 수 있으면서도 그런 모욕과 고통을 받으실 만큼 저를 사랑하신다고 믿게 해주소서. 사실 그것 말고는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의 품안에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느끼게 해주소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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