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이종훈] 나해 6월 12일(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고통과 순수

나해 6월 12일(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고통과 순수(+MP3)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한다. 두 축일 이름이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두 분은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다. 나는 하느님이 아니니까 매 맞고 가시관에 찔리는 고통 말고는 예수님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자식의 억울한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성모님의 고통은 상상은 된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 없고 고통 없이 사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우리 하느님은 고통을 구원의 수단으로 삼으셨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고통은 반갑지 않지만, 고통을 겪은 이들은 변한다. 우리는 고통을 이기는 게 아니라 견디어 내고 그 시간이 지나간다. 고통을 즐길 수는 없지만, 그것을 온전히 나의 몫으로, 내 인생의 일부로, 하느님께 가는 길에서 피해 갈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여긴다.

예수님은 수난과 그런 죽음을 예상하셨고,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며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마태 27,46)”라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시편 22장의 첫 구절인데 이 시편은 하느님의 승리와 찬양으로 끝맺는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지상 사명으로 여기셨다. 그러나 성모님의 경우는 완전히 달랐다. 비록 성경에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셨다는 내용은 없어도 그분의 영혼이 칼에 찔리는(루카 2,35)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다. 아들의 죽음으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믿어서 고통스럽지 않았다면 성모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 우리와 상관없는 분이다. 원죄에 물들지 않고 잉태되신 것이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알고 예상하셨지만, 성모님은 그러실 수 없었다. 그러니 성모님이 예수님보다 더 고통스러우셨을 거다. 불경한 생각일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모님을 찾아가셨다는 내용도 성경에는 없지만 우리는 모두 당연히 그러셨을 거라고 믿는다.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게 아니라 부활의 흔적을 발견한 게 사흘만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잃어버린 어린 예수님을 사흘 동안 찾아 헤맸다. 그런데 그분은 죽 성전에 계셨고, 부모도 그걸 안다고 생각하셨다(루카 2,49). 예수님은 우리가 모르고 찾을 수 없는 곳에 숨어계시지 않는다. 우리가 그분을 잃어버리고 그분의 약속을 잊어버리곤 한다. 우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겪으신 성모님은 이런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도와주신다.

예수님, 주님의 어머니를 저희 어머니가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는 환하게 웃지 않으시지만 그렇다고 슬퍼하지도 않으십니다. 모진 시간을 다 견디어내신 모습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는 말 못 할 고민이 없고 숨길 아픔도 없습니다. 아드님을 품어 낳아주셨듯이 저희도 당신 안에 품어 새로운 사람으로 낳아주소서. 아멘.

 

성경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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