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3일 기뻐하자
다윗왕은 하느님의 궤를 자신이 사는 곳으로 모시게 되자 온힘을 다해서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2사무 6,14). 그것은 보여주기 위한 춤이 아니라 하느님의 궤를 자신의 집에 모신 내적 기쁨이 밖으로 흘러넘친 춤이었을 것이다. 막춤이었을 것이다. 임금의 위엄, 권위, 체면도 잊어버리고 그는 어린이처럼 기쁨을 있는 그대로 다 표현했다. 아니 감출 수 없고 참을 수 없을 만큼 기뻤나보다. 부럽다.
그렇게 기뻐했던 날이 있었나? 대학합격 소식을 들은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춤을 추지는 않았지만 그 기쁨을 감추기 힘들었던 것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그렇게 가슴 벅차게 기뻐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럼 지금은? 나에게 묻는다. 기쁜가? 행복한가?
우리는 기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지만 별로 기쁘지 않다. 오죽하면 ‘복음의 기쁨’이라는 문헌까지 나왔을까? 교우들도 잘 읽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 읽을 리 없다. 그래서 교우들에게 ‘기뻐하십시오.’라고 호소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사도들도 교우들에게 기뻐하라고 그것도 언제나 기뻐하고(필리 4,1; 1테살 5,16), 심지어 환난과 고통 중에도 기뻐하라고 권고했다(1베드 4,13).
그 당시 교우들도 오늘 우리처럼 사는 게 기쁘지 않았나보다. 게다가 박해까지 받았으니 더 그랬겠지. 감사의 마음은 받은 것에 대한 정서적인 반응인데도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권고(1테살 5,18)한 것을 보면 감사는 노력인가보다. 마찬가지로 기쁨도 반응이 아니라 결심이고 노력인가 보다. 생각해보니 받은 것에만 기뻐한다면 앞으로 춤추며 기뻐할 날은 아마 오지 않을 것 같다. 기뻐하자, 주님께서 나를 형제요, 친구라고 부르시지 않는가.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돌보는 어머니, 그분을 지키는 아버지라고 부르신다. 내가 들은 말씀은 사실이고 진리이고 시간이 지나면 다 그대로 이루어진다. ‘주님,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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