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기부

 

[마신부와 함께 하는 성경강의] 마르코복음 2장

겸손기도 1,660 2013-09-17 08:56:20
마르코 복음 2장

2장의 주제의 흐름
치유의 계속(육체) - 죄인과의 만남(영혼) - 단식 논쟁(법규와 본질) - 안식일(법규와 본질)

2장은 그리 길지 않은 느낌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계속되지만 이제 예수님이 보다 본질적으로 무엇을 치유하고 싶으신지가 잘 드러나게 됩니다. 나아가 단식 논쟁과 안식일 사건으로 외적인 법규와 보다 본질적인 것 가운데 무엇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든 들어가시면서 가장 먼저는 사람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십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최우선시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의 혜택을 입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찾아옵니다. 그는 바로 중풍 병자였습니다.

타인을 위한 전구, 기도
하지만 이 부분에서 우리가 잘 살펴야 하는 것은 '중풍 병자'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 혼자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중풍 병자는 다른 네 사람이 들것에 싣고 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진리 하나는 '타인을 위한 전구, 기도'라는 주제입니다. 때로 우리의 생에 영적으로 중풍 병자의 꼴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무지 자기 스스로 선을 찾아 행할 줄을 모르고 언제나 세상 것을 향해 굳어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그리스도 신자 가정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그리스도 신자 가정에 더 많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앙을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이방인이라면 오히려 마음이 부드러울텐데, 이 신자라는 딱지를 단 사람들은 벌써 한 번 맛을 보았으니 안다고 생각하고는 거기에서 멈춰 굳어져버린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이 굳은 이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오는 데에는 4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마음을 모아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한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영적으로' 이끌 수가 있습니다. 미사 중에 하는 신자들의 기도 만이라도 우리가 마음을 진심으로 모은다면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그들의 믿음
중풍 병자는 그렇게 예수님 앞에 당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보신다는 것에도 주목합시다. 앞서의 주제에 상응하는 대목입니다. 사실 중풍 병자는 만사가 귀찮은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침대에만 누워 있고 싶은 마음에 예수님 앞에 오기 전에 그를 데려가려는 사람들을 저주하고 비난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를 바라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믿음을 보십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편이 술주정이 심하고 신앙에 전혀 관심이 없을 때에 아내는 자녀들과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남편의 마음을 바꿀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죄의 용서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첫마디는 다음과 같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조금 뜬금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몸이 굳어 있는 환자를 데리고 갔는데 '죄'를 운운하다니요. 하지만 예수님은 성령을 지니신 분으로 모든 사물의 진수를 꿰뚫고 있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했다는 것은 실제로 중풍 병자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중풍의 치유가 아니라 그 마음 속의 '죄'의 치유라는 사실입니다. 거기다가 예수님은 중풍 병자의 몸의 병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도 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의 육적인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서 신앙에 매달리는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별을 잘 해야 합니다. 우리의 악습에서 비롯된 병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시작된 병이라면 정말 이 병이 사라져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좋으신 하느님은 애초부터 그걸 시작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병을 감싸 안아야 합니다. 그걸 껴안음으로써 얻게 되는 영적인 열매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은 조심해야 합니다. 정말 고통스러워 하는 병자는 곁에서 그 고통을 함께 해 주어야지 이런 가르침을 주면서 '알아서 해라'라고 한다면 그건 우리의 사랑의 부족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와서 예수님께서는 '육'의 치유에 앞서서 '영'의 치유를 선행하시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보다 본질적인 사명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권한
이어 예수님에게 의문을 품는 이들이 등장하고 예수님은 당신의 권한을 신비로운 양식으로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분은 '영의 치유'의 권한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육의 치유'를 마치 손쉬운 일을 하듯이 처리하십니다. 그저 말 한 마디로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돌아가라고 명하시고 그 일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진정한 청원
우리는 예수님을 무엇 때문에 찾고 있는 걸까요? 과연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요? 우리는 과연 우리의 영의 치유를 바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여전히 현세적인 어떤 목적을 갈구하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 스스로 분별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우리가 무엇을 청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청하고 있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은총을 가득히 부어 주시니까요. 그러니 쉬지말고 청하십시오. 당신의 기도가 하늘에 닿게 하고 당신의 정신이 깨치지 못한 것들을 성령께서 대신 청하게 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안의 성령의 청원을 들으시고 필요한 것을 이루도록 도와 주게 하십시오.

레위와 세리와 함께한 식사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짧은 한 마디의 말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오신 분이시고 바로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이 말은 우리 모든 죄인들에게 크나큰 희망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반대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성가신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는 언제나 두 부류가 있으니 한 부류는 언제나 자신을 낮은 자리에 두는 부류입니다. 하느님 앞에 자기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있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밝히 드러나시게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 내어놓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전능하시고 영원하시고 온갖 선의 근원이신 그분 앞에서 자신의 나약과 부족을 뼈저리게 체험한 이들이고 하느님의 은총을 그야말로 간절히 필요로하는 이들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아는 것도 많고 가진 것도 많고 이미 오른 직분도 높아서 함부로 내려오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합당한 권위가 명령할 때조차 그 권리를 포기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들은 눈 먼 이들이며 마음이 닫힌 이들입니다. 이들은 순명의 가치를 모르며 반대로 온 세상이 자기에게 순명하기는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이 두 부류에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복음, 즉 기쁜 소식이 되는 말씀이 반대로 교만하고 가진 자들에게는 비판의 말이 되어 버립니다. 같은 입에서 동시에 두 방향으로 말씀이 나아가는 셈입니다. 과연 우리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그걸 알아보는 건 간단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모든 행적과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서 기뻐하나요 아니면 성가시게 되나요?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십시오. 그러면 답은 가까이 있습니다.

단식 논쟁 - 새것과 헌것
이번 장을 꿰뚫고 있는 주제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껍데기 신앙에만 빠져 있는 이들에게 일침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새로운 포도주는 새로운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새로운 가르침은 새로운 마음과 정신에 담아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옛 것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의 대표격은 '율법'입니다. 율법이란 아직 인간들의 의식이 깨이지 않았을 무렵 약자를 보호하고 악한 이들을 벌하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율법의 정신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으니 예수님의 모든 말과 행동을 자신이 가진 틀에다 비춰보고 트집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은 '법'에 사로잡혀 있지요. 법이 하는 역할은 '죄악'을 극명히 드러내는 것 뿐입니다. 법은 그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지요. 법은 무엇이 죽을 죄인지를 극명히 밝혀주지만 반대로 '사랑'을 드러내지는 못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령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어쩌다 한 번 고기를 구웠는데 그 날이 금요일이었습니다. 이런 따스한 어머니의 마음을 법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규정대로 심하게 벌하겠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그 법을 뛰어넘어 그 어머니의 따스한 마음을 감싸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우리에게 보다 본질적인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법이 왜 생겨났는지 그 법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지. 이런 가르침들은 온전히 새로운 것이어서 새로운 그릇이 필요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옛 것에 길들여져 있었고 옛 것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릴 수 밖에요.
예수님은 모든 혼인 잔치의 주인입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그 나날들이 얼마나 기쁜 나날들이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은 슬픔에 잠겨있을 틈이 없고 예수님과 함께 건강히 먹고 마시면서 기쁨의 소식을 전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처럼 이들은 곧 예수님을 빼앗길 운명이었고 그때에는 마땅히 단식을 하고 슬픔과 비탄을 마음 속에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 밀이삭 사건
앞서의 새것과 헌것 논쟁은 이 안식일에 행한 제자들의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발언으로 더욱 확고해집니다. 누가 누구의 주인인지,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그 다음인지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위해 모든 법규와 규정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하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모든 인간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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