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이종훈] 나해 7월 3일(성 토마스 사도 축일) 상처 받을 용기(+MP3)

나해 7월 3일(성 토마스 사도 축일) 상처 받을 용기

토마스 사도는 불신의 아이콘이 아니다. 며칠 전 죽어 묻힌 사람이 되살았다는 사실을 아무 고민이나 증거 없이 믿는다고 했다면 그의 믿음은 텅 비어 있어 공허할 거다. 입으로만 믿지 마음은 믿지 않고 삶도 그 신앙고백과 같지 않을 거다. 사실 다른 제자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뵌 후에야 믿었다.


토마스 사도는 오늘 복음을 듣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거다. 믿어 세례를 받고, 성체를 받아먹지만, 그의 믿음 안에는 불신이 있다. 그러니까 여기저기서 갖가지 방식으로 믿으라고 외치는 거다. 요한 복음서를 쓴 목적도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다시 한번,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 살아계시고, 2천 년 전에 갈릴래아에서 하시던 대로 계속 일하시고, 오늘도 성찬례 안에서 인류를 위해서 수난 하시고 돌아가시고 또 부활하신다고 믿는다.


토마스 사도는 솔직하고 강직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신이 가시는 길을 알고 있다고 하시자 그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느냐고(요한 14,5) 반문했다. 당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시려는 스승을 따르며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고 했다. 그는 정말 그렇게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거기까지였다. 스승님을 따라 불의에 맞서 싸우다 죽을 용기는 있었지만, 부활은 믿을 수 없었다. 맞서 싸우지 않고 반대로 상처 입고 그들의 먹이가 되어주어서 승리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이리 떼 가운데에서 어린 양으로서(마태 10,16) 하늘나라를 전하셨다. 예상대로 그분은 물어뜯기고 그들의 먹이가 되셨다.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세상 안에서 이타적이고 순수하게 사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희생되셨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대로다. 지금 여기서 그렇게 살면 우리도 그렇게 된다. 상처 입고 희생된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따라 살고 그분처럼 상처 입을 것이다. 믿지 않으면 어둡고 무거운 불신의 짐을 지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어정쩡하게 지내게 된다.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하고 말씀하셨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신 예수님, 손을 뻗어 주님의 상처에 손을 대겠습니다. 생각만, 성찰만, 기도만이 아니라 두 손을 뻗어 세상의 상처를 만지겠습니다. 어느 주교의 말처럼 주님의 상처에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은 복음을 전할 자격이 없습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한다면 사랑도 하느님도 알지 못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두렵고, 주저합니다. 할 만하고 할 수 있으니 아드님께서 따라서 오라고 하셨을 겁니다. 어머니께서 도와주시면 잘은 못하겠지만 할 수는 있습니다. 아멘.

 

성경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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