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9일 같은 하느님이시기를
TV에 가난하거나 극한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을 돕기 위한 모금 방송을 보면 채널을 돌린다. 그런 방송을 보기 싫어서도 적지만 후원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도저히 그 모습을 볼 수 없어서이다. 너무 마음 아프고 그렇게 만드는 세상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무심히 볼 수가 없다. 왜 일까? 내가 그렇게 자비롭고 의롭기 때문일까? 그러기를 바라지만 그보다는 그 방송을 보면서 내가 그들이 되기 때문 일거다. 다시 말해 저렇게 되고 싶지 않기 때문 일거다.
기도는 하느님과 대화,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 있듯 그분도 살아계시기 때문에 둘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둘은 사랑하는 사이, 친한 사이, 잘 모르는 사이, 미워하는 사이일거다. 그리스도인들 중 하느님을 모르거나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내가 지금 알고 사랑하는 하느님이 여기 삶을 접고 뵙게 될 그분과 같은 분일까? TV에서 본 사람을 거리에서 만난 것처럼 나만 그분을 알고 그분은 나를 모르시지는 않을까? 아니면 나도 그분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어떤 것을 좋아하면 그것을 보고 싶고 더 알고 싶어 한다.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그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고 그가 좋아할 일을 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고 그분을 기쁘게 해드릴 것이다.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고, 그분은 이제 내가 너무 마음 아파 볼 수 없는 그 이웃들과 함께 계신다(마태 25,40). 내가 그런 처지가 된다면 누군가 나를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바쁘고 그들 삶도 팍팍하고 게다가 그들에게 그렇게 할 법적인 책임과 윤리적인 의무가 없다는 것 잘 알지만, 그래도 없는 시간을 쪼개고, 간당간당한 수입을 조금만 나눠주고, 그리고 염치없지만 지루하고 복잡한 내 이야기도 들어주고 국밥이라도 함께 먹어주기를 바랄 것이다.
사랑은 의지 안에 있고, 마음 아프고 수고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장면과 그 위에서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을 영화나 묵상 안에서만 보고 마음 아파할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힘겨워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할 것이다. 이제는 채널을 돌리지 말고, 그런 기사를 그냥 넘기지 말아야겠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나에게 당신을 만나고 심길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다. 의롭지 않고 자비롭지도 않으니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이 아파야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않겠나? 그래야 마지막 날에 하느님도 나도 서로를 알아 볼 것이고, 그분이 내가 지금 기도 중에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하던 중에 뵌 분과 같은 분임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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