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루카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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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말한다는 것이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말은 생각에서 나온다.
즉 말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뜻이다.
결국, 생각한다는 것이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예수님께 제자들에게 던지신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나를 뭐라고 말하느냐?”도 아니며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도 아니다.
그것은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는 질문이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나타나셔서 똑 같은 질문을 던지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
생각한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분명 다르다.
생각은 머리에서 나오고, 믿음은 가슴에서 나온다.
믿음은 생각을 넘어서는 세계이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는 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우리의 그분에 대한 고백이 생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마음의 고백이어야 한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믿음이다.
성경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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