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이종훈] 12월 27일(성가정 축일) 하느님께 가는 순례(+ mp3)

12월 27일(가정 축일) 하느님께 가는 순례

 

탄시기가 시작되는 저녁에 고모가 돌아가셨다. 코로나 때문에 빈소를 마련하지 못했다고 했다. 장례미사는 고사하고 연도도 바치지 못했다. 고약한 코로나가 정말 밉다. 세례를 받게 한 분은 부모님이셨지만 신앙을 가르쳐주신 분은 고모였다. 어린 시절 바로 앞집에 사셨던 고모 집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배웠다. 고모부는 사진으로만 뵀으니까 고모는 근 50년을 혼자 사신 셈이다. 평신도 선교사 개념도 없던 시대에 섬에 가셔서 공소회장직 맡아 하셨고, 방에 있는 전례력에 따라 옷을 갈아입힌 그리스도왕 인형과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경 필사 노트들은 그분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알려준다. 하느님은 그분에게 모든 것이었다.

 

그런데 그분의 마지막은 하느님만 바라보며 살던 그분의 삶에 대한 보상이나 축복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분의 평생 삶보다 더 가난한 장례였다. 얼마 전 병자사를 해드리고 마음속으로 장례미사를 준비했었는데 그것을 빼앗겨버렸다. 코로나가 다시 또 밉다. 하지만 속상한 건 나와 남겨진 가족들의 몫이다. 사실 문상과 장례미사는 고인보다는 유족들을 위한 것이다.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닮아 가난해졌고, 그래서 하느님이 전부였던 그분에게 평생의 바람대로 이제 하느님을 다 차지하셨을 테고, 그토록 아끼던 동생 수녀님과 먼저 떠난 남동생들을 만나셨을 테니 그분은 지금 최고로 행복하실 거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게 우리 인생 최고의 행복이다.

 

혼인미사 강론 중 신혼부부는 잘 모르고 이미 가정을 꾸미고 있는 하객들이 깊이 공감하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서로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허락해주라는 당부다. 가정생활을 하지 않는 내가 어떻게 가정에 대해 말할 수 있냐고 물을 수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가정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가정들을 더 잘 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서로 사랑해서 가정을 꾸미지만, 나는 생전부지 사람들을 만나 형제라고 부르며 사랑하려고 있는 힘을 다하고 있으니 그 정도의 말은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당부를 다른 말로 하면 소유하거나 지배하려 들지 말라는 뜻이다. 가족이라 좀 닮기는 했어도 그는 나와 다른 한 사람이다.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령으로 인한 수태를 수용한 마리아도 놀랍지만 천사의 말만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 요셉 인은 더 놀랍다. 령잉태는 말 그대로 령께서 하신 일이니 그게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반면에 요셉 인의 결정은 인간적인 행위이니 더 친근하게 느껴지고 존경스럽다. 그분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구세주 오시기를 2천 년 더 기다려야 했을 지도 모른다. 가정이 있어서 예수님은 우리 동네 한 사람으로 온전하게 자랄 수 있었다. 그 안에서 예수님은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이것이 가정의 역할이다. 가족 구원 각자의 내면에서 예수님이 자라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혼자 왔다 혼자 떠난다. 인생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긴 순례다. 가정은 울타리가 되어주고 가족은 동반자가 되어 준다. 하느님 나라가 내가 속해야 할 완전한 가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주님이 보내주신 가족과 친구가 있어 인생은 외롭지 않습니다. 가정생활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는 건 그것 또한 하느님을 찾아가는 걸 도와주는 도구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 일 말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모님, 흔들리는 가정을 보호해주시고, 혼자 사는 이들의 어머니가 되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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