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 약해지고 작아지기
한 어르신이 자전거에 옆으로 삐져나올 정도로 짐을 잔뜩 싣고 오고 계셨다. 길이 좁아 서로 지나쳐갈 수 없어 보여 한 쪽으로 비켜 그 어르신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분이 지나쳐가며 ‘죄송합니다.’하고 인사하셨다. 예상치 못한 인사말에 엉겁결에 ‘아닙니다.’고 대답했다. 작은 호의를 베푼 내가 오히려 죄인이 된 묘한 기분이었다.
그냥 휙 지나쳐가도 될 텐데 게다가 죄송하다고 인사해야할만한 상황도 아니었지만 그 어르신은 자신을 낮췄다. 그 앞에서 나는 더 작아졌다. 이상한 일이다. 작지만 호의를 베푼 것 나였는데 그런 인사말에 왜 나는 더 작아지는 느낌이었을까? 내가 작아진 게 아니라 그분이 큰 분이었던 것 같다. 큰마음을 지닌 분이셨으니 약해질 수 있었겠지. 약해지고 작아져도 괜찮음을, 강해지고 큰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됨을 또 다시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독한 경쟁사회에서는 이러면 안 되겠지? 이런 마음과 삶의 태도는 영성생활에서나 요구되는 것일까? 선한 경쟁은 더 좋은 삶을 위해서 필요한 자극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러는 가운데 서로에게 주는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하나? 하느님은 용서하시지만 그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에게 용서를 청할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상처를 준 것이 아니라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무죄하다는 주장은 아니고 억울하다는 뜻이다. 내가 그러려고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용서를 요구할 수 없지만 그가 용서하지 않으면 나는 마지막 한 닢까지 다 갚기 전에는 그에게서 풀려나오지 못한다(루카 12,59). 모르는 척 할 수는 있지만 내 마음은 결코 모르지 않는다. 하느님도 그에게 용서를 강요하실 수 없다. 온전히 그의 몫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에게 대한 나의 몫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그 앞에서 약해지고 작아졌다면 그에게 그런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았을 것이고, 그 또한 스스로 약해지고 작아진 나를 공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걸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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