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9월 21일(한가위) 저녁노을
저녁 무렵 시장가는 길, 벼 익는 향기와 함께 서쪽 산 위로 펼쳐진 붉은 노을이 멋지다. 그것은 편안함을 넘어 진한 감동이다. 동해의 떠오르는 붉은 태양은 부담스럽지만, 서산의 붉은 노을은 밖에서 놀고 있는 나를 저녁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 목소리 같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한가위 풍속도는 많이 바뀌었지만, 수확과 기쁨 그리고 감사와 기억이라는 이 명절의 의미는 잊지 않는다. 나의 마지막 날이 저녁노을처럼 이웃에게 감동은 주지 못해도 나에게는 평화롭고 아름답기를 바란다. 묵시록은 그날을 이렇게 말한다.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 …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묵시 14, 13).”
그날은 주님이 수확하시는 날이다. 주님의 낫은 아주 날카로워 단 한 번에 밑동을 잘라 나를 땅에서 떼어내실 것이다. 농부의 관심은 잘 익은 벼지 거기 듬성듬성 섞여 있는 피가 아니다. 그것들은 그냥 다 버린다. 주님의 관심은 나의 선행과 사랑이지 죄가 아니다. 심지도 않은 피가 자라는 것처럼 의도하지 않아도 삼시 세끼 먹는 것처럼 죄를 짓는다. 그걸 완전히 피하는 길은 죽음뿐이다. 하지만 죽으면 선행 봉사 희생 사랑도 할 수 없다. 죄를 짓더라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좋은 일을 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다. 나의 허다한 죄들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과 자비 안에서 다 타서 재까지 사라진다.
믿음으로 우리 죄가 없어지니 막살아도 되는 거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그건 봉사와 사랑의 기쁨을 모르는 이의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 마음은 하느님을 향하고 있어서 유혹하는 자는 그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한다. 하느님이 사랑과 선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은 이기적인 인간 본성을 거스르지만, 이상한 중독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걸 한 번도 안 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하는 사람은 없다. 땅의 셈법으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헤아릴 수 없다. 나의 죄와 선행을 저울질하면 그 결과는 보나 마나 지만 십자가로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는 다르게 계산된다. 이게 저녁노을이 평화롭고 감동적인 이유가 될 거다.
예수님, 제 날수를 셀 줄 알게 가르쳐주시어 슬기로운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시편 90, 12). 기쁘시려고 저를 지으셨으니 저의 죄는 모아 태워 없애주시고 선행과 사랑만 보아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에서 퍼져 나오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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