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3일(연중 4주일) 정의와 자비
자비와 용서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어 모든 죄인을 용서하십니다. 이런 하느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분을 의심하거나 그분의 후한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죄와 벌이 한 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본능이라고 할 정도로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에게 봉사 헌신 윤리와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은 지 오래됐지만 연일 이어지는 고발 폭로 음해 변명 거짓말에 눈과 귀를 씻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들이 정의를 빙자해서 권력을 잡기 위해 그런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국민들이 그런 것을 싫어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마치 로마시대에 원형경기장에서 노예검투사들이 싸우다 피 흘리며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즐기는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자비와 용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비와 용서를 바라지만 자비를 베풀고 용서함에는 매우 인색한 것 같습니다.
세상 속에서 정의와 자비는 서로 반대되고 만날 수 없는 기찻길 같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은 지금보다 더 엄격했던 것 같습니다. 나병환자는 부정한 사람이라 공동체에서 떨어져 살아야했던 것처럼 죄인들은 하느님과 분리되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율법을 아셨지만 그분은 그들을 품어 안으셨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런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분리되어야만 하는 이들을 품어 안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그들은 부정한 이들이 아니라 병자들이었고, 범죄자가 아니라 실패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의사요, 인자한 아버지로서 그들을 품어 안으셨습니다.
우리는 정의롭기보다는 자비롭게 용서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이웃에게는 정의롭게만 대하는데 그 정의 안에서는 자비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무조건 자비롭기만 하느님이 못마땅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메온이 예언한대로 반대 받는 표적이 되셨고(루카 2,34), 끝내 반대하는 이들에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자비와 용서를 바라면서도 자비롭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하느님은 당신의 아드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어놓으시는 희생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정의가 세상에 드러났습니다(로마 3,25). 세상의 정의와 하느님의 정의는 이렇게 다릅니다. 세상 것은 죄를 밝히고 합당한 벌을 줌으로 끝나지만 하느님의 것은 죄를 없애고 죄인을 살려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인색하고 완고한 우리들에게 정말 큰 도전이고 과제입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의로움에게 자비의 옷을 입혀야합니다. 자비는 자기희생으로 지어지는 하느님의 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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