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6일 복음의 해석
전화 편지 영상으로는 성사배령이 안 된다. 성사는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매체를 통해 하느님 이야기는 전해줄 수 있으나 하느님 자신은 전해줄 수 없다. 화면 속의 산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동네 뒷산 산책길에 비길 수 없고 그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 보여도 그것은 그저 그림일 뿐이다.
정보와 지식은 디지털화될 수 있어 편리하지만 인격은 그렇게 될 수 없다. 철저히 아날로그적이다. 하느님 이야기는 디지털화될 수 있어도 하느님은 아날로그적이다. 하느님도 당신의 사람들이 없으면 하시고 싶은 일을 못하실 거다. 사람만이 사람에게 하느님을 온전하게 전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사람이 지닌 한계 내의 온전함이다.
모르는 것, 경험하지 못한 것, 추리할 수 없는 것을 전할 수 없다. 복음을 전해 받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자신의 그릇만큼만 담을 수 있다. 그러면 내가 전하는 복음,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내 안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떻게 해석되나?
디지털 문화가 편리하지만 피곤하다. 제멋대로 생긴 그릇에 네모반듯한 지식을 억지로 넣으려는 느낌이다. 물이나 밀가루 반죽은 제멋대로 생긴 그릇에도 온전히 다 담기지만 네모반듯한 그것은 그럴 수 없다. 제멋대로 생긴 두 그릇에 온전히 다 담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향집이고 또 어머니의 품이다. 내가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은 거기까지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품은 그것보다 훨씬 더 좋단다. 믿어야지. 갈 수 없는 고향집과 어머니의 품에 대한 그리움이 그 단순한 믿음에 녹아 사라진다. 서로에게 고향집과 어머니의 품이 되어주는 세상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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