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훈] 나해 8월 24일(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검지(+MP3)

나해 8월 24일(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검지

청년 시절 어느 날 밤 대기대순환 연구 결과를 분석하던 중 문득 이 지구 안에는 보이지 않는 무엇이 더 있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게 하느님의 첫 부르심이었다. 내가 선택한 줄 알았는데 주님이 먼저 나를 보시고 선택하셨다. 나도 몰랐던 나의 깊은 바람을 아시고 나를 불러주셨다. 나를 구원하셨다.

한때는 참으로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괴로웠다. 부모봉양, 자녀 양육이라는 천부적인 의무들을 다 팽개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따라 살았다고 생각했다. 혼수상태에 빠진 아버지의 손을 잡고 속으로 인제 그만 넘어가시라고 말씀드렸는데 아버지는 정말 그다음 날 그렇게 하셨다. 수도원 간다고 집을 나올 때 귀찮아서 책상 서랍에 그냥 두고 온 묵주가 어머니 손에 들려 있었다. 아들이 떠난 빈방 그 책상에 앉으셨을 어머니를 떠올리지 못했다. 참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잘 생각해보면 자식은 언젠가 부모를 떠나기 마련이고, 여생을 병원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주님께 가는 게 당연히 낫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는 예수님 말씀만 믿고 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유보다는 내어줌 또는 희생을 더 생각하게 된다. 처음에는 봉사, 봉헌, 희생, 원수사랑, 목숨을 내놓는 사랑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에 점점 마음이 끌린다. 인제 보니 자유롭게 될 거라는 말씀 전에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8,31-32).”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따라가야만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다는 뜻이다. 다 내어주어야 완전히 자유로워진다. 이 세상 최고가치보다 더 크고 고귀한 것이 있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면 그곳에 다다른다.

청년이 되면서 집은 잠자는 곳이 되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냈다. 그 시간도 좋았지만 파 다듬고 청소하는 수도원 생활이 더 좋았다. 선교사 생활도 좋지만 하면 할수록 이 삶이 가리키는 그곳에 대한 갈증이 더 커진다. 여기서 사는 게 전부가 아님을 이제 조금 알겠다. 부모봉양과 자녀 양육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 그것은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하고 고귀한 것이다. 엉망진창 뒤죽박죽 잘 못 살아도 어떻게 해서든 이렇게 끝까지 살면 내 인생은 그걸 가리키는 검지가 된다.

예수님,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데려오기 전에 주님은 이미 그를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다. 그가 아니라 주님이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선택하신 분도 열매를 맺어주시는 분도 주님 당신이십니다. 저는 단지 주님 말씀을 외우고 간직할 뿐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렸을 때는 이상한 그림이었는데 이제는 저를 인도해주시는 길잡이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