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김인순] 시나이 산

르비딤에 있는 산에서 내려와 저무는 길을 달려 호텔에 도착했다.

이 집은 돌산 위에 지어졌는데 방갈로 같은 숙소가 이리저리 배치된 것이 특이했다.

가 본 적도 없는 고원지대에 있는 티베트의 성채가 자꾸만 생각났다.

호텔의 로비에서 모이세는 내일 새벽에 시작되는 시나이 산 등정을 위해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말해 주었다.

특히 낙타를 타는 요령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모이세에 의하면 시나이 산 길에는 폭탄이 있다고 한다. 모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건 바로 낙타 ‘응가 폭탄’인데 혹여 산길을 걷다가 그 폭탄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이세의 재미있는 설명으로, 시나이 산을 걸어 올라가면서

모세의 마음을 느껴보겠다던 자매들까지도 낙타를 타기로 마음을 바꿨다.

저녁을 먹은 다음 빈 시간을 이용하여 모두 호텔 안에 있는 쇼핑코너를 돌아보기도 하면서

산책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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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 시, 모닝콜 소리에 일어나 잠이 덜 깬 눈을 하고 호텔 로비에 모였더니 

모이세가 우릴 놀렸다. 밤새 모두 뚱보가 되었다면서.

그럴 것이 일출 전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있는 옷 중 가장 두꺼운 옷을 입고 또 껴입고 나타났으니.

호텔 앞에서 버스를 타고 10여 분 정도나 갔을까, 곧 시나이 산 산 아래에 있는 성채 옆에 도착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곳이 바로 그 유명한 성 가타리나 수도원의 담벼락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어둠 속에서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모이세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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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외에도 어딘지 모를 곳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이 저마다 자기네 나라말로 떠들면서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모두 낙타 정류장으로 모이는 것이었다.

이곳에서부터 사람들은 낙타를 타거나 걷거나 하면서 시나이 산을 오르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안내자인 모이세는 낙타를 타고 산에 오르는 걸 그리 추천하지 않았다.

가끔 사고가 날 때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 또 낙타를 타볼까 싶어서 대부분이 낙타를 타겠다고 손을 든 것이다.

 

우리 일행 중 14명이 낙타를 타고 신부님과 두 명의 수녀만 걸어서 올라가기로 했다.

우리는 안내자 모이세의 말을 명심하면서 차례로 몸을 굽히고 앉아있는 낙타 등에 올라탔다.

낙타가 일어서자 바짝 긴장 됐지만 손잡이를 꼭 붙들고 마음을 느긋하게 먹었다.

어젯밤에 모이세가 말해준 대로 낙타의 동작에 맞춰 긴장을 풀고 몸을 느슨하게 움직였더니

모든 것이 원만했다. 저마다 낙타를 타고 정상을 향해 한 사람씩 출발했다.

내가 탄 낙타도 걷기 시작했다. 벌써 내 앞으로 많은 낙타가 지나가고 있었다.

낙타의 푸드덕대는 소리, 동물 특유의 냄새, 서로 일행을 부르는 소리로

어둠 속에서 부산함이 일었다.

다른 팀들과 섞여 올라가면서 가끔 일행을 확인하기 위해 정한 암호는 ‘모이세’였다. 

몰이꾼 한 사람이 두세 마리 정도의 낙타를 돌보며 따라 걷고 있었다.

내가 탄 낙타는 몇 번이나 길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제 길로 들어서겠지 싶어서 기다리다가 결정적으로 길을 벗어나면

‘어, 어’라고 낮은 소리로 사람을 불렀다.그러면 어둠 속 어디선가 나타난 몰이꾼이

서두르지도 않고 낙타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얼러서 제 길로 들여놓았다.

그러느라고 내가 탄 낙타는 다른 낙타를 계속 앞으로 보내면서 뒤로 쳐졌다.

가끔 모이세를 부르며 지나치는 낙타도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하! 우리 일행이구나 싶은 안심과 반가움이 일었다.

 

낙타를 타지 않고 걸어 올라갔더라면 그 나름의 좋은 맛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걷는 데 마음을 쓰느라고 우주의 별들이 쏟아지는 밤하늘의 풍경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공기가 맑은 광야지대라 그런지 한국의 시골에서 보던 별보다 더 크고 밝은 별들이

어두운 하늘에 가득했다.

어느 순간 그 많은 별빛이 온통 나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신비로움에 취해 내 곁을 지나가는 낙타와 사람들의 수런거림을 잊어버렸다.

갑자기 오래전에 기억했던 별에 대한 시가 뚜렷하게 떠오르기도 했다.

고요한 이 시간, 아름답고 장엄한 우주의 향연을 통해 하느님은 나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고 계셨다.

나는 그분의 사랑에 잠겨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렇게 ‘그분을 듣는 것이 바로 기도로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 안의 아우성을 접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경탄하며 받아들이는 것.

얼마나 갔는지 약한 불빛에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낙타 정거장에 도착한 것이다.

낙타에서 내린 사람들은 불빛이 흘러나오는 매점으로 들어가 일행을 만난다.

우리도 그곳에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는 자매들을 만났다.

이곳부터 정상까지는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앞에 가는 사람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평소에 많이 걷지 않았거나 몸이 약한 자매들은 힘들었을 것이다.

올라가다가 힘이 들면 길옆으로 벗어나 쉬고 또 올라갔다.

그렇게 가파른 돌계단을 거의 한 시간 정도는 올라갔을 것이다.

날이 밝기 시작했는지 조금씩 주변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나이 산 정상에 올라간 우리는 자리를 잡고 일출을 기다렸다.

우리는 가져온 옷 중에서 제일 두꺼운 옷과 걸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몸을 감싸고

침묵 속에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밝음을 감춘 어둠은 고독한 찬 기운을 가졌다. 모두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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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침묵 속에 기도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얼마 동안을 추위에 떨며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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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산 아래로 카타리나 수도원의 모습이 보였다.

구름을 붉게 물들이던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순간 주변에서 탄성이 터졌다.

모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손을 모으고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 태양, 오,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모세의 하느님.

그리고, 저의 하느님, 오늘 이곳에 있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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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오늘 한국에서는 음력으로 정월 초하루였다. 

오전 일곱 시쯤, 우리는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커피숍을 겸한 산장으로 들어갔다.

갑갑하지만 아늑한 그곳에서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며 수도서원을 갱신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거룩한 계약을 맺은 시나이 산에 올라

우리도 하느님께 드린 약속을 다시 기억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우리는 미사를 드리면서 감동에 젖어 울먹이며 평화의 인사를 나누었다.

당신의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불러주신 것에 대해 감사에 찬 사랑의 인사를.

정말 잊지 못할 새해 첫 미사였다.

미사를 마친 우리는 산장커피숍의 바리스타가 만들어주는 커피를 마셨다.

물론 일회용 커피를 뜨거운 물에 타 마시는 커피지만,

덕분에 모두 얼었던 몸을 풀고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벨무사(모세의 산)라고도 불리는 시나이 산 정상은 해발 2,245m라고 한다.

한라산이 해발 1,950m인데 그보다 훨씬 높다.

지금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구약시대에는 사람이 오기 힘든 자연 그대로의 경외감 넘치는 산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앉아서 해뜨기를 기다리던 어느 봉우리쯤에서

모세가 신을 벗고 엎드려 하느님의 현현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시나이 산 정상 주변의 산들은 붉은빛이 도는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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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거하시는 또 다른 광야인 산의 장엄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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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안내자 모이세는 이곳 시나이 산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순례자들을 시나이 산으로 이끄는 모세가 된 것이다.

우리에게 모이세는 ‘모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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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 갈 때는 모두 낙타를 타지 않고 걸었다.

올라갈 때는 어둠 속에서 앞에 가는 일행에 신경 쓰느라고 몰랐는데

밝은 날에 바라본 산길은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나무가 없는 삭막한 산의 모습이 낯설었다.

광야와 이어진 지역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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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내려왔을까,

모세가 떨기나무를 보았다는 장소에 몇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외에 시나이 산에는 나무나 풀을 볼 수가 없었다.

산이 높으니 길은 험하고 가팔랐다.

한사람 정도만 통과 할 수 있는 좁은 협곡도 있었다.

이집트 여학생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히잡을 쓰고 긴 옷으로 몸을 두르고 있었다.

우리처럼 성지를 오르는 것이 아니고 등산일 것이다.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면서 산을 오르는 소녀들의 모습들이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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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떠오르자 날씨가 더워졌다.

올라올 때 입고 온 오리털 파카가 산에서 내려갈 때는 짐이 되었다.

새벽이라서 춥다고 잔뜩 겁먹고 둘둘 싸고 올라간 것이 너무 미련하지 않았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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