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이종훈] 자비와 정의를 하나로(사순제5주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 하늘나라에서 회의가 열렸습니다. 정의를 주관하는 장관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했으니, 그들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하고 그 대가로 세상을 모두 쓸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자비를 주관하는 장관은, 그렇게 되면 하느님의 자비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반문하며 무조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두 장관, 즉 자비와 정의가 팽팽하게 맞서는 대립상황에서, 하느님은 해결책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죄도 흠도 없는 순결한 이의 희생을 통해 이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제시한 조건에 맞는 희생 제물은 땅에는 물론이고 하늘나라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만이 그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해서 사람이 되셨고,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충족시키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는 베르나르도 성인이 환시 중에 본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고, 하느님의 아들이 희생제물이 되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희생 제물 때문에 세상은 벌을 받아 멸망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요한 3,16-17).” 하느님의 마음은 심판과 벌이 아니라, 용서와 구원입니다. 구원은 유한하고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이 하느님의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말의 뜻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부활은 환생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옛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 하느님 뜻에 부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저 세상에서나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굳이 종교적인 시각이 아니더라도, 역경을 겪어냈거나 혹은 방종이나 교만함으로 큰 잘못을 저질러 죽을 만큼 고생을 했던 사람들이 그전과는 사뭇 다르게 사는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것이겠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모두 당신처럼 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지만 하느님의 마음과 지혜를 지닌 분이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한 여인을 죽음에서 구해내셨습니다(요한 8,1-11). 그 여인은 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고 그들은 그녀를 이용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면 한 여인을 현장에서 죽게 만드는 무자비한 사람이 되고, ‘아니요’라고 대답하면 율법에 도전하는 위험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자비와 정의가 맞서고 있는 상황입니다. 완전한 덫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 쓰시면서 다그치는 그들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당신에게 끌어오십니다. 단죄와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들의 마음을 모두 당신 자신에게 쏟아지게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율법에 따라 행하라고 하시며 율법의 정의를 실현하셨지만, 그보다 먼저 심판자의 자격에 대해서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만이 올바르게 심판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죄인을 고발하고, 당신을 시험하려는 이들을 모두 돌아가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죽음을 면했고, 하느님의 자비는 실현되었습니다.

 

황제에게 내는 세금 문제(마태 22,15-22),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질문(마태 22,34-40)등 예수님의 권위를 의심하고 당신에게 곤궁에 빠뜨리기 위해 도전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언제 명쾌한 대답을 하셔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셨습니다. 그분의 대답은 하느님다운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인간들에게 제3의 답, 하느님의 답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당신 자신을 이미 내어 놓으신 당신의 마음 안에서 그런 대답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그분에게 하느님의 자비에 의심을 품는 이들의 숨은 의도는 이미 다 드러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지혜로운 대답 덕택에 그 여인은 죽음의 형벌을 피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살게 되었습니다. 마치 이집트 병사들의 추격을 받는 가운데서 앞을 가로막은 홍해를 마른 땅을 밟고 건너갔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 여인은 죽음의 형벌을 피해 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단죄가 아니라 용서를,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주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세상은 비난, 단죄, 심판과 벌을 정의라고 말하지만, 하느님께 정의는 당신의 약속대로 우리를 모두 살리는 자비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그분의 희생으로 용서받습니다. 그리고 옛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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