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훈] 황량한 곳에서도 이어지는 감동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황량한 곳에서도 이어지는 감동 (성체성혈대축일)

영화를 엄선해서 보다보니 1년에 한 편도 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큰 이유는 영화 속과 밖의 현실이 너무 다름입니다. 영화를 보며 깊은 감동 속에서 반성과 좋은 결심을 해보지만, 실천은 며칠 이어지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영화 속의 감동이 현실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화와 현실은 분명 다르지만, 받은 감동과 선한 결심은 거짓이 아니기에 그대로 이어가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수많은 사람들도 하느님 나라에 관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게다가 자신의 병을 치유 받거나 그것을 목격하면서(루카 9,11), 감동도 받고 인생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군중들은 기뻐하거나 지난 시간의 잘못들을 뉘우치며 가슴이 뜨거워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가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차가운 현실에 대해서 알려드립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루카 9,12).”

제자들의 생각과 현실 판단에는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들도 스승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언제나 깊은 감동을 받고 그분을 더욱 존경하게 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은 꿈에서 깨어나야 했습니다.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마을로 가서 잠자리, 먹거리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그 감동을 계속 이어가고 싶으셨습니다. 당신의 말씀이, 그들의 감동이 현실이 되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3절).” 그 때 제자들은 분명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알아왔던 스승님의 인품까지 의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공동체의 궁핍한 사정을 모르실리 없으신 분이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군대 후임에 대한 선임의 가혹행위를 과장해서 말할 때, 천 원 주며 이것저것 많은 것을 사오라고 하면서 잔돈까지 꼭 챙겨오라고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기억납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그런 분부를 듣고, 저분이 몽상가이거나, 심지 않은 데서 거두려하고 뿌리지 않고서 모으려하는 모진 폭군 같은 사람인가 의심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이 황량했던 것처럼 그들이 가진 것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비해 물자도 풍요로워지고 생활도 매우 편리해졌지만, 삶의 질은 오히려 더 나빠진 것 같습니다. 높은 자살률, 입에 올리기에도 힘든 흉측한 사건들, 정말 기운 빠지게 하고 박탈감 느끼게 하는 권력자들의 비리들을 보면 우리도 그 때 제자들과 같은 현실 판단을 내려야할 것 같습니다.

알폰소 성인은 영성체로 우리가 받는 가장 큰 은혜는 ‘거룩한 머무름’이라고 했습니다. 음식을 먹어 그 음식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보다 더 완전한 일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 위해 음식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육체적으로 완전히 하나가 되고서 이제는 영적인 일치를 이루자고 초대하십니다. 그 일치 안에서는 누구나 다 온전합니다. 그분을 부정하지 않는 한 모두가 다 위로받고, 사랑받습니다. 거기에는 시시비비도, 훈계도, 채근도, 힘내라는 요구도 없습니다. 그저 한없는 고요 속에 평화만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취도, 환각도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영적 일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죄에 대한 후회도, 고마움의 눈물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없었을 겁니다. 비록 상처받은 죄인이지만 그분에게는 당신의 목숨을 바쳐 얻은 한 없이 사랑스러운 자녀요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 안에는 힘이 다시 차오릅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그들의 공동체에게도 부족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인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명령하셨지만, 정작 먹을 것을 주신 분은 당신 자신이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의심스러우면서도 군중들을 식사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 준 것뿐이었습니다. 제자들도 그들과 함께 배부르게 먹었을 겁니다. 의심하면서도 스승의 분부대로 행동했던 미약한 믿음만으로도 그들은 그 황량한 곳에서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그 빈약한 믿음으로도 황량한 그곳에서 하느님의 나라와 감동은 계속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매일 혹은 주일마다 참례하는 성찬례(미사)가 의무이행이나 종교행사가 아니라, 2천 년 전, 아니 천지창조 때부터 시작된 하느님 사랑의 시간이고, 땅에 내려 온 하느님 나라임을 믿음이 우리가 배부르게 위로를 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의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