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이종훈] 3월 28일 유리벽

3월 28일 유리벽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치유하셨다. 그분이 안식일 규정을 모르셨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분은 안식일 규정을 어기신 것 같이 보인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 안식일의 주인이라서 상황에 따라 그 규정을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셨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안식일 규정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해서 그분이 규정을 어기신 것으로 보인 것일까?

 

38년 동안 비참하게 살아 온 그 사람을 만난 하느님의 마음 안에 어떤 것들이 일어나고 있었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연민과 그를 회복시켜주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그것이다. 그것은 우리도 그렇다. 우리는 연민은 느끼지만 그를 회복시켜 줄 능력이 없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실제적으로는 많은 조건과 제약들이 있어서 선뜻 나서지 못한다. 우리를 선뜻 나서지 못 하게 하는 그 어떤 것이 바로 율법 규정에 대한 몰이해의 증거가 아닐까?

 

‘우리는 율법이라는 맑은 유리를 통해 진리를 선명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유리 때문에 진리에 다가설 수 없다.’고 말한 한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진리를 잘 아는 것만으로는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것에 따라 살아갈 때 자유롭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유리벽을 깨고 진리를 품을 수 있을까? 우리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38년을 치유의 연못 옆에서 기다렸어도 치유될 수 없었던 그 사람처럼 우리의 힘으로는 유리벽을 깰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유리벽은 더 두꺼워지는 것 같고, 게다가 힘은 더 약해진다. 그런데 우리의 약해짐이 그 유리벽을 깰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안식일 규정을 잘 아셨고, 그것을 어기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는 느낌대로 행동하면 실패하지만, 그분의 연민과 사랑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분에게 맡기자. 우리는 힘이 없으니 그분에게 해 달라고 청하자. 38년 동안 비참하게 살아 온 그 사람을 만나셨을 때 느끼셨던 그분의 연민 속으로 들어가자. 그 나머지는 그분에게 맡기자. 그러면 그 두꺼운 유리벽도 깨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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