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6일 믿음과 새로운 삶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 그런데 개인마다 그 믿음의 깊이와 굳셈에는 차이가 있다. 누구는 입으로만 믿고, 다른 사람은 필요한 만큼만, 이해하는 만큼만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바치고, 자신의 아들까지 내어 줄 수 있을 정도로 믿는다. 믿음은 지금 여기서 하는 고백이고 결단이지만, 그것은 미래의 삶을 규정한다.
그 믿음이 얼마나 깊고 굳건한지 자기 자신도 모르고 하느님도 모르신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다(창세 22,1). 그가 외아들 이사악도 당신께 바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지 시험하셨다. 그 명을 들은 아브라함은 아무 말 없이 행동으로 옮겼다. 그것을 그의 절대적인 순명의 표현이었다면 아브라함은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겠는가? 조카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 파멸에 대해서 하느님과 감히 흥정까지 하던 그가 아니었던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도 표현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극도의 갈등과 고통 그 자체였을 것이다.
믿음은 우리의 미래를 환하게 밝혀주는 것이 아닌가보다. 갈등과 혼란 속에 있어서 차라리 어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겠다. 그는 묵묵히 걸어간다, 자신을 불사를 장작더미를 짊어진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과 함께. 아마 이사악은 아버지의 짐을 대신 짊어져서 아버지를 돕고 있다고 여겼겠지. 아들을 찌르려는 순간,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것인지 증명되었고, 시험은 끝났다. 아브라함도 자신의 믿음을 보았고, 하느님은 그에게 다시 한 번 큰 약속을 하셨다. 그리고 그 약속은 지금 이렇게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져가고 있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
장작을 짊어지고 갔던 이사악은 살았지만, 십자가를 지고 갔던 예수님은 돌아가셨다. 그분은 하느님의 사랑하는 외아드님이셨다. 하느님이 자신의 외아들까지 바치려했던 아브라함의 충실함을 보셨다면, 우리는 당신의 외아드님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본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믿으라고 표징을 보여주셨다. 이 땅위에 그보다 더 크고 확실한 표징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시련을 겪는다. 없어지고 말 황금도 강한 불로 단련을 받는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이 그런 시련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1베드 1,7). 믿음이 굳건해지고 깊어지는 과정,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길에서 우리가 겪는 갈등, 혼란, 불안,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은 당연하다. 그것들을 끝까지 참고 견디면 구원을 얻는다(마태 10,22; 24,13).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것은 마지막 날 우리를 맞아주시는 분이 친구들의 믿음만으로도 중풍병자를 구원해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병자는 치유해달라고 청원하지도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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