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십자가(주님변모축일 8월 6일)
예수님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당신의 거룩한 모습을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연히 그들에게 그 거룩한 모습을 들킨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시간 이후 벌어질 일들이 제자들에게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 동안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의 모습이셨고(루카 24,19), 마귀도 쫓아내는 능력을 지니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지도자들에 의해 권력자의 손에 넘겨져 극도의 고난과 치욕스러운 십자가형을 받으시는 것을 그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은 그것이 당신의 운명이고 지상 사명의 일부라는 확신하셨지만 제자들은 그런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변모하시기 바로 전에 첫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마태 16,21). 그러자 베드로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하면서 그분의 길을 막아섰습니다. 사실 그 전에 베드로는 용감하고 거룩하게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라고 멋지게 고백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거의 저주에 가까운 말로 심하게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하는 구세주의 모습과 하느님이 보내주신 구세주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산에서 뵌 찬란히 빛나는 스승님과, 그리고 무력하게 끌려 다니고 조롱을 당하며 결국 사형수로 십자가에 치욕스럽게 달려 있는 스승님이 어떻게 같은 분이시라고 인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구세주가 그렇게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도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있는 그 모습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멋지게 고백하자마자 그분에게 꾸지람을 들은 것 이외에도, 그 산에서 모세, 엘리야, 예수님의 빛나는 모습을 보고 거기에서 그분들과 함께 살자고 제안했지만, 막상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리자 몹시 두려워하며 고개도 들지 못했습니다(마태 17,6). 그리고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지만, 결국 세 번씩이라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고는 그는 울었습니다. 스승님께 죄송하기도 했겠지만, 그런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저주스러워 목 놓아 울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절망했을 겁니다. ‘내가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제가 수도원에 입회 준비를 하던 때는 제가 천사일 줄 알았습니다. 밤마다 성경 읽고 촛불 켜고 기도하고, 바쁜 중에도 꼬박꼬박 매일미사에 참례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수도생활이 시작되자 악마로 변했습니다. 불평, 미움, 이기적인 생각과 행동들이 거룩한 바람들을 짓눌렀습니다. 이제는 이런 자신에 대해서 여전히 속상하고 하느님께 죄송하지만 놀라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이런 사람인 줄은 저만 몰랐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제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도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하게 될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저나 베드로나 사악한 사람이어서가 그런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 달려 계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영광,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없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하느님의 아들의 모습은 하느님 사랑의 완전한 표지입니다. 그것은 아들까지, 당신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사랑이며, 우리의 죽음을 당신의 죽음으로 없애주신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넘겨주시고 난 뒤의 그분의 육체는 저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기억한다면, 저 볼품없는 한 사형수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찾을 수 있고, 그것을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과 일치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아보는 것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은 다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고백했지만 그분의 길을 막아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도 세 번의 부인을 통해 자신에게 절망하고서는 스승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께 대한 참 사랑을 고백할 수 있었고, 그제야 진실로 그분의 뒤를 따를 수 있었습니다(요한 21,15-19).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성공, 인정, 칭찬 등 빛나는 미래 자신의 모습의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을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삶 전체가 그랬듯이 가장 작은이들을 사랑하여 당신을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공을 위한 마술이 아니고, 예수님은 그렇게 해줘야 할 의무를 지닌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느님, 우리에게 하늘길을 열어주신 분입니다. 그 길은 자신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용서, 자비, 사랑에만 희망을 두는 이들 눈에만 보입니다. 그런 눈을 지닌 사람은 십자가위 예수님을 바라 볼 때 죄송하지만 고마워하고, 슬프지만 환희 속에 기뻐합니다. 또한 그들은 소외되고 고통 속에서 홀로 울고 있는 이들을 위로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거기서 그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시들어 고개 숙인 모습에서 그의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일들을 기억해줄 줄 알고, 죽음으로 완성되며 그렇게 하느님 곁으로 넘어가는 삶의 신비를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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