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은 의지와 여유(연중 20주일, 8월 20일)
살면서 넘어갈 수 없어 보이는 장벽 같은 장애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마귀가 호되게 걸려 고생하는 딸을 위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러 갔던 한 이방인 아주머니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 소문을 듣고 좋은 일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리를 질러도 눈길도 주시지 않을뿐더러 가까스로 만나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여인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사실 예수님을 한없이 좋은 분, 하느님이라고 믿는 우리들에게도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여인에게 돌아 온 이 대답은 넘어갈 수도 비집고 들어갈 틈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과 같았을 것입니다. 세상 어디 쉬운 일이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데 이런 일을 당하면 더 실망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흔들리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실망하고 교회와 성직자들을 비난하며 신앙을 버리기도 합니다. 안타깝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선교활동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장애물을 만나고 실망하고 화도 납니다. 그럴 때마다 기도하며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곤 합니다. ‘왜 이 일을 하려 하니?’, ‘무엇을 얻고자 하지?’ 등 그 일의 목적과 그 지향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합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아닙니다. 하느님은 저의 도움이 필요하신 분이 아닙니다. 제발 저의 성취욕을 채우거나 좋은 성과를 거두고 그 보람을 맛보고 싶은 마음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즉시 그런 욕구들을 버립니다. 단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를 바라고,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 기쁘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마음을 다지곤 합니다. 설령 그 일이 잘 안 되고, 실패해도 그렇습니다.
그 이방인 여인은 아주 용감했습니다. 절대적인 남성위주 사회에서 여자의 몸으로,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이방인을 개나 돼지로 낮추어 부르는 유다인들 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런 용기는 분명 고통 받는 딸을 구하겠다는 마음에서 생겨났을 겁니다. 그리고 이방인은 도와줄 수 없다는 예수님의 차가운 거절에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하고 멋지게 되받아칠 수 있는 유머도 같은 마음에서 생겨났을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 넘어갈 수 없는 벽에 문이 생겨난 것입니다. 만일 딸을 구하겠다는 굳은 의지만 있었다면 아마 예수님의 그 대답에 실망하고 화를 내며 돌아갔을 겁니다. 그녀는 의지와 함께 유머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머는 여유로운 마음에서 나오고, 여유는 확고한 신뢰에서 생겨납니다. 이방인이면서도 굳은 의지로 예수님과 대면할 수 있었다면, 유머 로 유다인에게 먼저 복음이 전해져야한다는 확고한 원칙(마태 10,5-6)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그런 확신에 예수님도 감탄하셨습니다. 사실 그것은 이미 이사야서가 예언했던 내용이었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그들의 번제물과 희생 제물들은 나의 제단 위에서 기꺼이 받아들여지리니,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이사 56,6-7).”
딸에 대한 그 여인의 사랑 안에는 딸을 구하겠다는 의지와 유머로 표현된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뢰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감탄하게 한 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신뢰였습니다. 고통과 어려움 중에서 유머를 잃지 않는 것은 쉽지 않을뿐더러 주위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습니다. 슬프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을 수 있고, 농담으로 삶의 무게를 줄일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언제나 자신과 함께 계시다는 확신이고 그분께 대한 신뢰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감동시키고 마침내 그 일을 이루어냅니다. 인류구원을 이루어내신 예수님의 삶은 외형적으로 슬프고 고단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분의 마음도 그랬을 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예루살렘 여인들을 오히려 위로하셨고, 당신 우측에 달린 도둑에게 마지막으로 멋진 도둑질을 하여 당신과 함께 하늘나라에 들어가셨습니다(루카 23,42-43).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신을 조롱하는 이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사실 그것, 죄인들을 용서하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심오하지만 무겁지 않습니다. 어린이가 부모님을 완전히 신뢰하듯이 단순하게 하느님을 신뢰할 때 우리가 겪어내야 할 삶의 짐들은 딱 그 무게만큼만 느낄 수 있을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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