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고통의 성모 마리아) 고통의 승리
역사시사 고발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보지 못한다.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불의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의 눈물과 고통을 견딜 자신이 없어서이다. 인간의 폭력, 탐욕, 오만이 저질러놓은 악행의 결과를 고스란히 약자들이 떠안아야하는 현실을 슬퍼하며 그냥 지켜만 볼 자신이 없다. 슬픔은 분노로 바뀔 것이고 그 분노는 자칫 또 다른 폭력을 낳을 수 있을 것 같다.
예수님도 불의하게 희생되셨다.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은 당신이 고통의 임금이심을 상징한다. 무죄한 이들이 받는 고통 중 최고이다. 그분의 행적을 아는 이들은 그분의 고통을 보고 울었다. 그런데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알고 또 그분을 낳아 키운 어머니로서 성모님의 고통은 상상할 수 없다. 예수님의 그것보다 더 크다고 말하면 잘못일까?
시메온은 일찍이 이 일을 예언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24-25).” 어쩌면 예수님의 고통은 그리스도로서 정해진 운명이었지만 마리아님은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예언이었기에 그 예언이 정말로 현실이 된 거기서 마리아님이 받아야 할 고통이 더 컸을 것이다.
뉘우침의 고통, 통회의 눈물은 영혼을 치유하고 건강하게 해준다. 그런데 사회 구조적인 악에 의한 죄의 경우는 다르다. 그에 희생된 약자의 눈물을 보고 승리의 축배를 드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불의하고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과 그들을 사랑하는 이들의 눈물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의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나게 한다. 그들은 성모님의 슬픔과 고통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눈물 흘리며 아파하는 그 작은이들 곁이다.
술 취한 이들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나도 얼마든지 저 반대편에서 승리의 술에 취해 진실을 제대로 못 볼 수 있다. 그렇게 될까 걱정되고 두렵다. 정의, 진실, 사랑의 편에 서 있고 싶다. 하느님 편에 있고 싶다. 성모님과 함께 있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나누어 받지만 그것이 분노와 복수로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 대신 하느님께서 우리 대신 싸워주시고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주시리라 믿는다. 우리는 그렇게 고난을 받으며 하느님의 힘과 섭리에 내어 맡기는 순종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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