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입은 세상(전교주일, 10월 22일)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선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품을 떠나 거친 세상 속으로 들어오셔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교회의 기원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 이견이 있는 것 같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파견하신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것은 참 하느님을 온 세상에 알려서 온 세상이 그분에게 복종하여 우리 모두가 평화롭게 살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내다 본 세상이 바로 그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 2,4).”
세상은 참 많이 변했고 또 매우 빠르게 변합니다. 세상이 변하니 선교방식도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옷만 바꿔 입는 변화가 아니라 그의 체질, 사고방식, 가치체계가 바뀌는 변화입니다. 변화가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가 겪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변화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탈바꿈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현상들은 수직적인 관계에서 더욱 수평적인 관계로 전환, 소통, 합리적인 결정과정, 평화적인 주장과 토론, 보편적인 복지, 차별 금지 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권위주의적인 교회의 모습은 참으로 시대에 뒤떨어졌고 복음의 본질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사실 우리 하느님은 한없이 낮아지셨고, 그분의 삶에서는 권위주의적인 모습은 하나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자신의 권위는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권위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넘겨주신 그 권위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전교하셨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인 교회의 권위는 마땅히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선교사명에 충실함이겠습니다.
세상은 변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종교인들을 무조건 존중하고 특별하게 대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고발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이런 변화와 도전을 불편하게 여기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종교세 부과를 주장하는 아주 간단한 근거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들은 종교인이기 이전에 국민의 한 사람이라는 주장입니다. 맞습니다, 종교인은 세상 밖에서 살지 않고 세상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도 성전세를 내셨습니다(마태 17,27). 당신이야말로 면세 대상이셨고, 섬김과 희생제사를 받아들이는 분이셨지만 세상 공동체의 한 일원임을 부정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의 입장을 감히 예수님과 비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전교합니다. 그 전교는 일방적으로, 마치 세상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마음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아니 그럴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제 교회는 세상에게 배우고, 특히 선한 의지를 갖고 일하는 많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평화를 위한 노력들을 배웁니다. 참으로 하느님은 세상 어디에나 계시고 누구에게나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로마 10,12).”
교회 안에 젊은이들이 사라지고 성소자들이 급감한 것이 놀랄 일이 아닌 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어느 날 이런 현상을 생각하며 우울해진 마음으로 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변해가면 나와 같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인가? 나는 사라져버릴 집단의 문을 닫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일까?’ 깊은 묵상 후에 가까스로 이런 대답을 찾았습니다. ‘아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우리와 같은 사람, 즉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느님을 잊지 않게 하는 사람은 세상 끝날 까지 있을 것이다. 왜? 사람은 하느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으니까.’ 두려운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내놓기에는 그 근거가 매우 빈약해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더 이상 교회의 존재가치와 역할에 대해서 묻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세상에 있을 것입니다(마태 28,20). 이제 남은 과제는 주님을 따라 더 낮은 곳으로 그래서 더 깊은 곳으로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상처받아 아파하는 이들 안에 계시는 주님을 만나 어떻게 섬길 것인지 궁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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