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부활 대축일) 작은 외침의 승리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마르 16,9). 그녀의 세상살이가 어떠했을 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 간음하는 현장에서 붙잡혀 와서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그 여인이 마리아 막달레나였을 것 같습니다(요한 8,34-5). 그녀는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큰 사건과 충격을 겪은 후에 그녀의 삶은 변하기 시작해서 그녀는 점차 일곱 마귀의 압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 삶의 지주, 구세주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권력자들은 그분을 하느님을 모독한 자이고 사회를 위험하게 만드는 자라고 심판했습니다.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한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녀는 그들 가운데에서 아니라고 그분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소리쳤지만 그녀의 소리는 군중의 폭력적인 외침에 묻혀버렸습니다. 그녀는 그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예수님을 지키려고 했지만 너무 작고 약해서 그분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안타깝고 죄송스러워 군중 속에서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그분께 대한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믿고 싶지 않지만 그녀의 눈앞에서 그분은 결국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두셨습니다.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동이 트기도 전에 그녀는 그분의 무덤에 갔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악몽이고 잠시 후면 깨어나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 숨을 쉬게 되기를 바랐을 겁입니다. 그런데 그 바람은 현실이 된 것 같았습니다. 무덤을 단단히 막았던 매우 큰 돌이 치워져 무덤 문은 열려 있었고 천사 같은 젊은이가 그분의 부활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녀와 동료들은 너무 놀라고 두려워 엊그제의 그 안타까움과 분노와 슬픔도 잊어버렸을 겁니다. 그것은 악몽 같았던 그 일들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녀 안에서 동이 트듯 짙은 어둠을 쪼개며 맑은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지난 몇 해 사이에 우리는 엄청난 일들을 겪었습니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허망하게 바다 속에 빠져 죽고, 전직 대통령들이 구속되고,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권력자들의 비리들이 밝혀지고, 꽁꽁 얼었던 남북관계에도 따뜻한 봄볕이 드리우고 있습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다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시간문제인 것 같습니다. 세월호가 수면에 다시 떠오르는 날은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날이 정말 오는 구나.’했습니다. 큰 고래 등에 아이들을 태워 데려오는 그림을 볼 때마다 코끝이 찡했었는데 그것이 현실이 된 것 같았습니다. 요즘은 진실은 가려질 수 없음을 확인하고 가슴에 새기는 시간입니다. 빈무덤이 예수님 부활의 직접적인 증거는 되지 못하지만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이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고 그분을 사랑했던 작은 사람들의 슬픔이 서서히 기쁨과 환희로 바뀌기 시작하는 신호입니다. 그들이 믿었던 그대로였습니다. 무죄하고 좋은 일을 그렇게 많이 하신 분이 죄인으로 죽음의 형벌을 받음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대로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어둠으로 빛을 덮을 수 없고, 속임수로 진실을 가릴 수 없습니다. 진실에 목말라하며 울던 이들을 나무라고 조롱하던 이들은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반대자들을 벌함이 아니라 작은이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상식에서 벗어난 일들을 폭력적으로 믿으라고 강요받으면서도 끝까지 아니라고 온 몸으로 말하고 진실이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작은 목소리로 외치며 울던 이들입니다. 그들은 ‘아나빔’, 남은 사람들, 주님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과 군중이 하느님의 가난한 종인 예수님을 대하듯 그들에게도 똑같이 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임수와 폭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세월호는 3년 만에 바다위로 떠올랐습니다. 그 작은이들에게 사흘과 3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겠지만 주님의 부활과 진실이 밝혀짐이 지난 시간의 아픔을 씻어주고 그들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산모가 아기의 탄생으로 끔찍했던 진통을 잊어버리듯 주님의 부활은 그들의 고통을 없애주고 나아가 적대자들을 용서하는 마음까지 만들어 놓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적대자들도 구원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생을 기억하며 부활하신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부끄럽지 않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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