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이종훈] 9월 16일(연중 24주일) 은혜로운 봉사직무

9월 16일(연중 24주일) 은혜로운 봉사직무

 

외국인 노동자 특히 태국노동자들을 돌보는 사목을 합니다. 어제는 지방에 사는 태국인 교우를 만났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를 찾아가 만나 점심도 같이 먹고 봉성체도 해줍니다. 저는 태국 말을 못하지만 태국에서 언어와 문화를 익힌 저희 평신도 협력자 형제의 도움으로 소통합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회의와 문서 작성하며 보내다가 사도직 현장에 나가니 참 좋았습니다. 제가 뭐하는 사람인지, 하느님께서 왜 그리고 어디로 저를 부르셨는지 새삼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노동자와 점심을 먹고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성당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저희가 자주 올 수 없으니 그 본당 식구들에게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자인 본당 사제가 당연히 부탁해야 할 제 1순위여야 할 텐데,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참 이상한 현실입니다. 성당에 들어갔는데 마침 기도하고 계신 수녀님의 뒷모습 보였습니다. 조용히 다가가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수녀님은 제가 아주 잘 아는 분이셨습니다. 이산가족상봉이라고 한 것처럼 격하게 반가워했습니다. 그렇게 쉽게 일이 해결되었습니다. 기적 같았습니다. 여자 노동자였기 때문에 살갑게 대해주기 어려웠는데 수녀님들이 손잡고 안아주고 반겨줘서 참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작은 교리실에서 간단하게 함께 봉성체 예식을 하였습니다. 그 노동자 교우는 성체를 영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옆에 계시던 수녀님이 그를 다시 안아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오래 전 어느 수녀원 벽에 붙어 있었던 글귀가 떠올랐습니다. ‘한 생명이 온 세상보다 소중하다.’ 한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여러 사람이 하루 종일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믿게 되었을 겁니다. 사목과 선교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어제 일 중 가장 마음 아프고 이상한 일은 본당 사제에게 그를 돌보아달라고 부탁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제의 가장 중요한 직무가 가장 작은이들을 우선적으로 돌보는 일인데, 요즘 우리 교회는 그런 일로 신부님을 성가시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높고 바쁜 분이라서. 저만 그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에 총장 신부님으로부터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모든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받았습니다(a letter to the People of God, 2018년 8월 20일). 눈과 귀를 의심하게 하는 참으로 우울한 교회의 추문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의 아동성학대, 권력남용, 양심을 저버리는 행동들로 인해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받은 교우들의 고통을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비겁하게 그것들을 덮으려 했고 가장 작은이들의 편에 서 있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지지도 않은 권력으로 그들에게 폭력을 가했습니다. 이 끔찍한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약자들을 더욱 철저하게 보호하고 무관용의 원칙(zero tolerance)으로 범죄자들을 대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비극의 핵심에 성직주의(Clericalism)가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성직자 수도자에게는 아무 권리가 없습니다. 굳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보수를 받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이고(1코린 9,18),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온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몸으로 채우는 것입니다(콜로 1,24).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직주의는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무효화할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놓으신 세례의 은사를 축소시키고 평가절하하는 시도입니다. 사제 스스로 또는 평신도들이 양산하는 성직주의는 교회의 몸 안에 분열을 초래하고, 오늘날 우리가 규탄하는 수많은 악을 지속시키고 부추기고 조장하는 것입니다. 학대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형태의 성직주의에 대해 단호히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성직자 수도자들은 모두 매우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그 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닌 것일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범죄행위들은 오래 전에 벌어졌던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었을 겁니다. 점점 그렇게 변해갔을 것 같습니다. 그들 스스로 그리고 다른 교우들이 그들을 교회의 중심과 높은 자리에 앉혀 놓았을 겁니다. 교황님은 이 상처와 아픔을 교회 전체가 단식과 기도로써 보속하며 치유해나가자고 권고하십니다. 그들 소수가 그런 것인데 왜 나와 우리 전체가 보속해야 하는지에 대해 교황님은 편지 처음부터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1코린 12,26).”라는 성경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느님께서는 한 개인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 공동체, 한 민족,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억지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이런 비극에 조금도 책임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교우들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는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우 부끄럽고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겪어야 했을 아픔과 치렀어야 할 보속이었을지 모릅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수도자 성직자들이 처음에 품었던 그 순수한 지향을 끝까지 지켜 충실히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헌신 봉사하게 기도하고 자신의 봉사직무가 곧 권리이고 삶의 기쁨임을 잊지 않게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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