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8일(연중 30주일) 흔들리지 말고 앞으로
예전에는 치약은 대부분 L치약, 비누는 D비누였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습니다. 요즘은 시장에 가면 어떤 치약을 사야할지 머리가 다 아프고 짜증까지 납니다. 지금은 다른 수사님이 장을 봐주시기 때문에 이런 고통(?)이 저를 괴롭히지는 않습니다. 창고에 가서 사다 놓으신 것들을 가져다 쓰면 됩니다. 사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치약과 비누의 이름도 모릅니다. 시장에 수많은 종류의 치약이 있어도 우리는 하나만 선택해서 사용합니다.
물건뿐만 아니라 오늘날은 참으로 많은 주장과 목소리를 듣습니다. 심지어 가짜뉴스라는 단어까지 생겨났습니다. 가짜뉴스는 말 그대로 거짓말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믿고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정말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가짜뉴스가 진짜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흔들리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참된 것 하나를 가려내고 또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참된 것 하나가 분명히 있고,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얼마 전에 끝난 일제강점기 때 의병활동을 소재로 다룬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일제강점기 때 우리 민족이 겪은 치욕과 수난 그리고 그 무기력함을 볼 때마다 화나고 그 당시 일본군과 친일세력들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내가 만일 그 시대에 살았다면 어느 편에 서있었을지 묻게 됩니다. 당연히 친일 쪽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드라마에서는 친일세력들이 비겁하고 악한 사람들처럼 그려지지만 실제로도 그랬을지는 모릅니다. 그들이 실제로 악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식별을 잘못한 것은 분명하고 그들의 인생관은 모르겠으나 탄압과 폭력을 선택한 것은 잘못입니다. 반면에 의병과 독립군들은 자신의 삶이 파괴되고 수많은 고통과 고초를 겼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안타까움과 서러움은 있었을지언정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은 없었을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우리처럼 바빌론 유배라는 치욕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치욕과 고통을 겪으면서 회심과 더불어 참된 신앙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을 ‘남은 자’ 혹은 ‘아나빔’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참된 신앙을 지키느라고 사회적 경제적 불이익을 당해야했습니다. 그런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그들은 끝까지 그 신앙 안에 남아있었고 마침내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삶이 힘겹기는 했지만 유배시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나 한 번도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을 겁니다. 그들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예레 31,7)”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박해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주님께서 수난과 박해를 당하셨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도 그럴 거라고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예리코의 눈먼 거지 바르티메오가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아나빔이고 복음서가 만들어질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이런 처지가 되어도 과연 수도원에 신학교에 사람들이 있을까요? 세례를 받는 사람이 있을까요? 답은 ‘예’입니다. 많지는 않겠지만 분명 있을 겁니다. 12억 전 세계 교우와 600만 한국 교우 중에 그런 사람들이 몇 분 계실 겁니다. 저도 그리고 여러분도 그 가운데에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수많은 주장과 목소리 중에서 참된 것을 가려내는 가장 기본적인 식별기준은 고통일 겁니다. 그렇다고 목숨을 빼앗는 박해는 아니겠지요. 그 대신 반대, 비난, 수고스러움, 무관심이 그것이 될 겁니다. 우리의 주장은 단순하고 한결 같습니다. 나눔, 상생 그래서 누리는 평화입니다. 그 길을 걷다가 그런 박해를 받으면 마음이 어두워져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바르티메오가 그랬던 것처럼 큰 소리로 주님을 부르고 잘 보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가던 그 길을 계속 가면 마음이 밝아져 잘 보게 될 겁니다. 잘 보여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니 잘 보이게 되는 겁니다. 흔들리지 말고 앞으로 계속 갑시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마르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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