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일(파스카성야) 약해지기
매 년 느끼지만 벗겨진 제대와 텅 빈 감실은 마음 정 중앙에 큰 구멍을 낸다. 함께 살며 잘 모시지도 못하고 안부연락도 못 드리면서도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그렇게 계실 줄만 알았던 부모님이 이제는 계시지 않음과 비슷하다. 부모님의 부재는 그리움과 죄송스러움이지만 하느님의 부재는 내가 어디로 가야하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름이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림이다.
언뜻 생각하면 하느님 없는 세상은 무법천지가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을 거다. 정반대로 세상은 더 엄격해질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규정해 놓은 완벽에 가까운 법과 무거운 형벌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다스릴 것 같다. 지금은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법들이 공동선과 인간존중을 지향하지만 그렇지 않은 세상에서는 힘이 그 법들을 만들고 또 세상을 다르실 거다.
사실 우리는 그런 교육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물론 집과 때로는 교회에서도 그런 교육을 받았다. 경쟁에서 이기고 승리하기, 강해지기를 배웠다. 그러나 모든 법의 근본원리인 하느님은 한없이 약해지셨다. 죽을 수 없는 분이 죽기까지 약해지셨다. 그것이 사랑이고 그분이 하느님이시며 그 길이 영원히 죽지 않는 길이라고 몸소 보여주시며 우리들을 가르치셨다. 그 식물에 맞는 화분이 있고 그 음식에 맞는 그릇이 있다. 그래서 그 소식, 주님의 부활 소식은 가장 약한 이들에게 제일 먼저 알려졌고, 또 그들의 눈과 입에 담아 전하게 하셨다. 여인들이 제일 먼저 빈무덤을 발견했고 주님 부활의 소식을 전했다. 그 당시 여인들의 말은 증언의 가치가 없었고 사람 숫자에 들지도 못한 이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구세주의 탄생 소식도 들에서 먹고 자는 하찮은 목동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수천수만 번 성체를 모셔도 하느님을 잘 모르는 것은 그분을 담을 그릇이 아직 안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강함이 아니라 약함 속에 계신다. 그분은 한없이 높은 분이지만 종처럼 낮아지고 힘없이 빼앗기듯이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셨다. 온 우주가 모두 당신 것임을 선언이라도 하시듯이 그렇게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땅과 땅 속까지 모두 다녀가셨다. 이제 그분의 손을 벗어날 길은 없다.
우리는 처음부터 잘못 배웠다. 하느님은 강력하시고 하늘 저 높은 곳에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조사하고 계시는 아주 두려운 분이라고. 그러나 예수님이 알려주고 보여주신 하느님은 그것과 정반대였다. 약해져도 살 수 있다. 아니 더 평화롭고 더 잘 살 수 있을 거다. 약해지는 게 어렵고 죽는 게 두렵기는 하지만 그 반대로 강해지려고 해서 과연 지금 우리는 행복한가? 연일 감당하기 버거운 소식을 보고 들으며 괴로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강해지고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라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들이 우리 몸 깊숙이 뼈 속까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단 하나 죽음뿐이다. 잘 때 빼고는 유혹과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렇게 불쌍한 우리가 세례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이 무엇인지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로마 6,3-5).”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불쌍한 저희가 주님의 십자가 길을 충실히 따라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이끌어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처럼 낮아지고 약해져야 되는 줄 알면서도 어색하고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저희를 위로하며 그 길을 따르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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