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이종훈] 6월 9일(성령강림대축일) 탄생의 어두움

6월 9일(성령강림대축일) 탄생의 어두움

 

땅 속에서 씨앗은 뿌리와 줄기를 만들고 어머니 태 안에서 생명이 잉태된다. 그것들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 지 아무도 모른다. 어느 날 땅 위로 잎이 나오고 어머니는 태동을 느끼고 아기가 태어난다. 생명은 그렇게 어두운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만들어진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식사도 함께 해서 기쁘기는 하지만 자신들이 겪고 있는 일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런 일들이 그들에게는 스승의 갑작스러운 죽음보다 더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부활은 죽음보다 더 짙은 어두움이었을 것이다. 스승의 죽음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황망했지만 죽어 묻힌 사람이 되살아나고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고 음식을 먹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혼란을 이미 내다보고 예고하셨고 그 혼란은 그들이 겪어내야만 할 과정이었던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민족, 새로운 종(種)이 탄생하기 위해 그들이 있어야 자리와 통과해야할 과정으로서 탄생의 어둠이었던 것 같다.

 

영이 생명을 주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3). 태초에 하느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예수님도 말씀으로, 주님의 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만드신다. 예수님은 당신을 하느님이라고 믿는 이들 안에서 그에게 선사된 신적인 생명의 주권을 행사하신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다(1코린 12,3). 부활하신 주님은 새로운 생명의 세계에 첫발을 들여놓게 된 제자들을 세상곳곳으로 보내신다. 당신이 아버지께 파견되신 것처럼 이제 신적인 생명을 시작한 그들을 파견하신다. 그런 그들에게는 용서하는 권한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그들을 통해 당신의 삶과 죽음이 바로 용서와 화해를 위한 것이었음을 온 세상에 알리시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님의 영으로 탄생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곳곳으로 파견되어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용서와 화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이며 동시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용서해야 미움과 복수심의 감옥에서 그리고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험담의 올가미에서 풀려나올 수 있음을 잘 알면서도 잘 되지 않는다. 주님의 명령이 아니어도 정말 화해하고 싶다. 서로 용서와 화해하고, 민족 간에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과 화해하고 싶다.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내 안에서 용서와 화해의 바람이 일지만 그 바람이 밖으로 불어나오지 못한다. 신적인 생명이 시작되었지만 자라나지 못한다. 용서하는 권한 주어졌는데도 그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어둠은 생명이 자랄 수 있는 여건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 안에서 당신의 주권을 더 강력하게 행사하시며 당신이 원하시고 나 또한 원하는 일을 해나가실 것이다. 바람아, 불어라.

 

예수님, 용서하고 화해하고 싶어도 잘 못하는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생명의 주권은 주님께 있으니 주님께서 저희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이 자라나게 하소서.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하느님의 어머니, 제 안에도 하느님의 생명을 낳아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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