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1일(연중 16주일) 기도하고 일하라
성경에 등장하는 마리아와 마르타는 기도와 봉사, 관상과 활동사이의 관계 혹은 긴장과 우선순위를 설명하는 대표 인물들이다. 마리아는 기도와 관상을, 마르타는 봉사와 활동을 상징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셨고, 마르타는 꾸지람을 받은 듯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기도와 관상 즉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어 그 안에 머무름이 중요하지만 거기에서만 그친다면 교회의 선교 본질은 사라진다. 둘 다 중요하지만 기도와 관상이 봉사와 활동에 우선한다. 베네딕토 성인의 그 유명한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가르침이 생겨난 당연한 이유이다.
예수님이 그들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마르타는 손님맞이에 분주한데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다. 마르타는 그런 마리아를 두고 불평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마르타는 얼마나 몸과 마음이 분주했었는지 바로 코앞에서 주님이 자신을 부르시는 목소리도 듣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두 번씩이나 그의 이름을 부르셨겠지. 우리 대부분은 마르타의 상황과 그의 마음을 정말 잘 안다. 봉사활동과 사도직을 행하면서도 기쁨보다는 그것들이 짐스러워지고 자신을 도와주지 않거나 열심히 일하지 않는 다른 동료와 이웃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곤 하니 말이다. 그렇게 일이 끝나고 나면 보람은 사라지고 그런 마음으로 일한 자신에 대해 실망스러워 또 다시 화가 난다.
반면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면 마리아의 그런 행동은 얄밉게 보인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를 칭찬하니 마르타는 얼마나 속상하고 억울하고 괴로웠겠는가? 그 마음은 루카 복음사가도 헤아릴 수 없었는지 꾸지람 같은 가르침을 들은 마르타의 반응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리아는 오빠 라자로가 죽었을 때 뒤늦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지 않았다. 마르타는 그답게 마을 어귀까지 나가 맞았지만 마리아는 집에 가만히 있었다(요한 11,20). 그러나 주님께서 그를 부르시자 얼른 일어나 그분께로 갔다(요한 11,29). 마르타는 주님을 찾아 나섰지만 마리아는 그분이 부르실 때까지 기다렸다. 마르타는 주님을 찾느라 수고했지만 마리아는 그분이 어디 계신지 알려주셔서 그분을 찾는 수고를 할 필요 없었다. 마르타가 능동적이었다면 마리아는 수동적이었다. 주도하는 이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셨다. 그렇다고 마리아가 마르타보다 더 깊고 굳은 신앙을 갖고 있었던 같지는 않다. 부활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기는 둘 다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32).” 하지만 마리아는 후에 예수님의 죽음, 즉 인류구원을 위한 그분의 희생을 예언하고 그분의 장례를 준비하는 행동을 한다(요한 12, 1-8). 그가 정말 예수님의 죽음을 내다봤는지 아니면 오빠를 되살리는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께 지극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여하튼 결과는 그렇게 돼버렸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 12,7).
하느님 없는 사도직은 스트레스, 동료들과의 다툼, 공동체 내의 분열을 야기한다. 아마 그것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계획 그리고 좋은 성과를 내서 성공하고 싶은 인간의 본성적인 욕망이 앞서기 때문일 거다. 우리는 예수님의 일, 사도들의 일, 수많은 성인들의 일을 지금 여기에서 이어서 한다. 처음부터 그 일은 예수님의 일, 하느님의 일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말씀, 사도직과 봉사활동의 주관자이신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분은 가장 작은이들, 가난한 이들, 상처 입은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 안에서 말씀하신다. 연민만큼 하느님의 마음에 가까운 것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일 수는 없다. 그것도 결국은 인간의 마음이니까. 그분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는 없어도 그분의 뜻에 자신을 맞추겠노라는 마음과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겠다는 결심과 지향을 새롭게 할 수는 있다. 모든 이가 이렇게 한 마음이라면 사도직과 봉사의 주관자는 주님이 되어주시고 그 시간과 자리는 그분의 현존이 될 것이다. 거기에 고단함은 있을지언정 스트레스, 다툼, 분열은 생길 수 없을 것이다. 기도하고 일함, 수동의 영성이란 이런 것일 거다.
주님,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내는 데 인색하지 않겠습니다. 연민도 주님의 뜻 안에 있을 때 진짜 연민이 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 모든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주님의 목소리를 잘 듣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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