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1일(연중 19주일) 순수한 믿음
사람들은 배워 아는 대로 살지 못하고 믿는 대로 사는 것 같다. 게다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면 결국 제 멋대로 산다는 뜻이다. 그러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기 쉽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는다.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믿는다. 이해할 수 없어도, 믿을 수 없어도 믿는다. 그리고 그분이 사셨던 대로 따라 살려고 노력한다. 그분은 스승이요, 치유자요, 구마자로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모든 이들의 청을 다 들어주셨다. 마치 주인의 명령을 충실하게 실행하는 종처럼 사셨다. 그분은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이 되셔서 종의 모습으로 사셨다. 그분의 능력은 모두 남을 위한 것이었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으셨다. 그러니 십자가 위에서 저렇게 생을 마감하셨겠지.
TV에서 네팔을 다녀온 여행 프로그램을 봤다. 종교와 사회가 분리되지 않은 나라인 것 같았다. 힌두교와 불교가 주된 종교였다. 그런데 신성하고 유명한 사원을 찾거나 엄격한 종교의식을 행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가족의 건강과 번영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했다. 힌두교 지도자인 구루들에게 돈을 주면 그들은 그들의 소원을 대신 빌어준다. 붓다가 굶어 죽어가는 호랑이에게 자신의 신체 일부를 떼어 주어 살렸다는 성지에서도 불교인들은 건강과 번영을 기원한다. 종교가 달라 그 가르침이 달라도 신도들의 바람은 하나인 것 같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 이후 하느님의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이 세상에서 스스로 이방인이요 나그네가 되었다(히브 11,13). 고향이 있었지만 하느님을 만난 이후로 그 고향이 바뀌었다. 예수님은 베틀레험에서 태어나시고 나자렛에서 자라셨지만 그분의 고향은 하늘나라였다. 그분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고향이 된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며 여기서는 스스로 이방인이 되어 나그네처럼 산다. 그러고 보면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계속 살거나 마지막에 고향 땅에 묻힌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요즘은 대부분 병원에서 죽고 공동 봉안시설에 묻히니 말이다.
예수님이야말로 이 세상에 사셨던 이방인이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상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을 섬기셨고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도 그래야한다고 여러 방식으로 가르치셨다.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 놓고 박해를 받은 사람은 그것의 수십 배, 백 배 돌려받을 것이라고 하셨지만, 그것은 여기가 아닌 저기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시는 것이었다(마태 19,29; 마르 10,30). 예수님의 제자가 됨은 세속적인 행운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하는 것이 훨씬 이해하기 편할 것 같다.
우리는 믿는다, 천주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 믿음이 모진 시련과 죽음의 위협으로 시험 당하는 걸 보면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믿은 대로 이루어져서 행복한 게 아니라, 믿어서 행복한 거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아브라함은 생명보다 소중한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의 명령대로 제물로 바치며 그의 믿음이 시험을 받았다. 사실 하느님은 그 아들 이사악을 통해 후손들이 자신의 이름을 물려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니(창세 21,12)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미 죽음을 넘어섰다. 아들 이사악이 죽었는데 어떻게 그의 후손들이 자신의 이름이 전해질지 도무지 알 수 없었을 텐데도 그는 하느님의 그 약속을 믿었다. 그의 믿음 안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이 땅의 삶은 봉사하고 섬기라는 주어진 시간이고 또 기회이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상에서 이방인이고 하늘나라를 찾아가는 나그네이다. 그리고 충실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을 돌보다가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혼인잔치를 마치고 돌아 온 주인을 맞이하는 행복한 종이다. 그 주인이 그 종을 극진히 대접해줄 것이 때문이다(루카 12,37). 이를 들어 잘 아는 데도 의심이 들곤 한다. 특히 여기서 보답을 받지 않은 것들의 수십 수백 배 상이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에 차곡차곡 쌓여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되고 있는 지, 정말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하는 곳인지(루카 12,33)’ 의심이 든다. 아브라함과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까지도 시련을 받았다. 의심은 자연스럽고 시련은 당연하다. 내 믿음은 그렇게 굳건해지고 순수해진다. 사라져버릴 금도 불로 단련을 받는데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이 그런 일을 겪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1베드 1,7). 갈등하는 인간이 아름답다면 믿음의 시련을 받는 그리스도인은 거룩하다.
주님, 믿음이 약한 저에게 믿음을 더 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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