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성모승천대축일, 광복절) 성모님
이른 새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쏟아 붓듯 내린 엊그제 요란한 비와는 사뭇 다르게 조용히 오는 듯 안 오는 듯 내린다. 창문을 닫으면 알아채지 못하게 내린다. 어제 뜨겁게 달구어졌던 대지와 건물을 제대로 식혀주는 고맙고 반가운 비다. 그래서일까 엊저녁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달라졌다. 반팔 옷이 살짝 어색할 정도로 새벽공기가 선선하다. 성모님 축일 선물인가 보다.
성모님에 대한 성경의 증언들은 다 모아도 몇 줄 되지 않을 텐데 사람들은 성모님을 참 좋아한다. 어머니, 엄마라고 다정하게 부르는 사람들도 많다. 하느님께는 송구하지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마음과 성모님을 엄마 어머니로 부르는 마음은 그 친밀감이 다르다. 성모님 교리는 학자들의 신학적인 성찰보다는 믿는 이들의 대중적인 신심에서 만들어졌다. 교회에서 선언하기 전에 이미 백성들이 알고 믿었던 것들을 나중에 신학자들이 정리하고 성찰해서 믿을 교리로 선포했다. 사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그렇게 복잡하고 많은 교리가 필요 없다. 그런 것은 믿지 않으려는 이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성모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마리아님도 우리와 같이 한계를 지닌 한 사람으로서 당신의 믿음을 완성하셨다. 하느님의 총애를 받아 처음부터 완전히 믿게 된 것이라기보다는 끝까지 십자가에서 죽은 아들의 시신을 품에 안을 때까지도 그 믿음과 신뢰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받으신 고통을 수없이 이야기하고 묵상한다. 그런데 성모님의 고통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아마 아들의 고통을 지켜봐야했던 어머니의 고통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두렵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 자식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부모는 많아도 부모를 위해서 죽겠다고 나서는 자식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들, 하느님의 아들이 수난을 겪고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성모님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그분이 느끼셨을 철저한 가난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도 그분은 믿으셨다. 목동들이 찾아왔을 때와 성전에서 어린 아들을 되찾았을 때만이 아니라 그 이후 아드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마음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셨을 것이다(루카 2,19.51). 성모님이 이런 분이시니 예수님이 우리들을 그분에게 맡기셨을 것이고, 우리가 성모님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칭얼대며 조르고 모든 것을 청함은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닐까? 성모님이 하늘에 계시지 않는다면 세상의 이 모든 인간적인 청원들을 어떻게 다 들으실 수 있겠나? 하느님이 하늘에만 계셨다면 우리는 엄마가 없으면 살 수 없음을 모르셨을 것이다.
우리가 성모님을 부르면 어머니는 우리를 아드님께로 데려다 주신다고 확신한다. 그분은 태양을 입어(묵시 12,1) 하느님의 총애를 받으셨기에(루카 1,30)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알아보고 그분이 이루신 인류구원의 길을 마지막까지 따라가셨던(요한 19,25) 인류 첫 번째 그리고 완전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셨다. 그분은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도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끝까지 믿으셨다. 그래서 행복하셨다(루카 1,45). 예수님이 마음이 가난해서 행복한 사람(마태 5,3)을 말씀하실 때 당신의 어머니를 떠올리셨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그래서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셨다고(마태 5,3) 하면 억지주장일까?
성모님이 땅에 묻히지 않고 어떻게 하늘에 오르셨는지 모른다. 삼백육십오 년 동안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데려가신 에녹(창세 5,23-24)과 회오리바람에 태워 데려가신 엘리야(2열왕 2,11)를 증거로 댈 수는 있겠지만, 그보다는 나와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그분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세상 오만 것을 청하고 있는 것이 더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그분은 예수님의 엄마 역할에 이어 오늘은 우리의 엄마로 살아계신다. 오늘은 무더위를 식혀주며 조용히 내리는 비로 당신의 현존을 알려주신다.
예수님, 당신은 사람을 아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어머니를 저희 어머니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꼭 다문 작은 입과 저만 바라보시는 어머니의 눈에서 하느님의 큰 능력을 봅니다. 우리는 어머니를 부르고 어머니는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해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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