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이종훈] 9월 9일 하느님의 슬픔

9월 9일 하느님의 슬픔

 

몇 해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 오셨을 때 방한기간 내내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셨고,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유가족 중 한 분을 만나 그의 손을 잡고 위로하셨다. 정치적으로 아주 예민했지만 그분에게는 그런 것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아보였다. 그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가슴 뭉클했지만 교황님을 환호하며 맞았던 이들 중에는 마음 불편했던 교우들도 꽤 있었던 것으로 안다.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상황에서 한 국가의 원수이지만 그 이전에 한 사람의 사제로서 그런 행동을 한 이유로 하신 말씀은 명언이 되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그의 탓이든 남의 탓이든 혹은 우리의 탓이든 그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고 창조주 하느님의 고통이다.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은 그나 나나 하느님이나 모두 하나다. 그 탓에 대한 심판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안식일에는 세상과 인간을 지어 만드신 하느님을 기억하고 찬미한다. 그분의 쉼은 곧 완성이었기 때문이다(창세 2,2-3). 오그라든 든 손을 보면서 어떻게 창조의 완성을 말하고 하느님을 공경 찬미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율법을 파괴하러가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마태 5,17). 안식일에는 좋은 일을 하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합당하다(루카 6,9). 그의 손이 온전해져야 그 안에 시작하신 하느님의 창조사업은 완성된다. 그래야 하느님은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고 좋아하시며 엿새 날 일을 마무리하시고(창세 1,31) 쉬실 수 있다.

 

인간과 피조물 고통으로 신음하는 모습 앞에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어떤 마음을 갖나? 누구 때문인가 묻고 그를 향해 단죄와 심판 나아가 저주의 독설을 퍼붓지는 않나? 그 고통에 과연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어서 그렇게 분노하나? 그런데 예수님을 움직인 것은 이런 율법적인 추론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 그분의 슬픔과 고통이었을 것이다. 하느님은 한 처음 세상을 하나하나 지어 만드신 그 때처럼 기쁘셔야 했다. 하느님이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모든 것이 그분의 뜻대로 회복되어야 했다. 당신의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그래야 했다.

 

예수님, 아버지 하느님을 그렇게 사랑하셨으니 당신을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권력자들의 죽음의 위협보다는 아버지 하느님이 슬퍼하심이 당신에겐 더 큰 두려움이고 고통이었을 겁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저는 하느님께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음을 잘 압니다. 그래도 뭔가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남은 하느님이 그것을 가장 작은이들에게 거저 주라는 분부라고 알아듣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게 인도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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