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일(민족들의 복음화) 회심과 복음화
어느 날 지하철 안에 서 있는데 한 아저씨가 지나치며 들릴까 말까하게 ‘예수님 믿으세요.’하고 말했다. 벌써 두세 달은 지났는데 그 목소리가 기억에 남아있다. 이런 광고 기술이 있다더니, 즉 평범한 영상 속에 팔고자하는 물건의 영상을 순간적으로 보여주면 그 잔상이 오래 남는다더니 정말이다. 예전처럼 공공장소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방식을 더는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아 반갑다.
요즘은 예수님을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 같으니 절실한 것은 그분의 이름을 선포함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선교가 교회의 존재이유이다. 그런데 종교가 세상에서 힘겹게 사는 이들의 짐을 덜어주기보다 오히려 짐이 되어버린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고 하셨는데, 뭔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언제나 그러셨듯이 이번 전교주일 담화에도 선교하는 교회, 밖으로 나가는 교회, 안락지대와 자기 민족과 종교의 아집에 머물러 있지 말고 문을 활짝 열어 내어주고 희생하는 교회, 지속적이고 항구한 선교적 회심을 언급하며 많은 성인과 교우들이 보여준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의 다그침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다 아는 이야기인데도 도전적으로 들리는 것은 내가 충분히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일 거다.
세례 받은 모든 이들은 선교사이고, 선교의 영성을 살고 있는 데도 전교와 선교라는 말이 왠지 어색하고 듣기 불편하다. 내가 받은 사명에 불충실한 탓일까? 아니면 시대적 요구일까? 그 대신 복음화라는 말은 매력적이다. 인간세상의 모든 삶, 즉 생활과 사고방식 그리고 제도와 법을 예수님의 가르침에 합당하게 바꾸고 새롭게 만든다는 뜻이다.
지금 나는 복음화 되어가는 중이다. 회개하는 중이다. 예수님께로 마음을 더 근본적으로 돌리는 중이다. 그래야 내가 완성되고 하느님처럼 영원히 산다고 믿는다. 나는 물건을 팔지 않고 영원히 사는 길을 세상과 공유한다. 완벽한 이론을 요란하게 주장하지 않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의 일상이라도 그것을 세상과 나눈다. 그 공유와 나눔이 지하철의 그 선교사의 작은 목소리처럼 사람들의 기억과 마음에 불편하지 않게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을 선교라고 부르면 좋겠다. 그것은 다시 나를 더 깊은 회심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는다(로마 10,10).”
예수님, 주님은 종교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저희들에게 전해주셨습니다. 그것은 힘을 키우고 그 세를 확장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도 복음화를 성과와 성공으로 환산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마음을 주님께로 돌립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을 아는 어머니의 지식을 제게 전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