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이종훈] 2월 19일 마음의 광야

2월 19일 마음의 광야 

 

예수님은 보통 그 자리에서 병자를 치유하셨는데, 벳사이다의 그 눈 먼 사람 경우는 그를 동네 밖으로 데리고 나가 고쳐주셨다(마르 8,23). 그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 큰 이유가 그가 살고 있는 동네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그 동네 벳사이다를 크게 나무라셨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마태 11,21).” 동네 밖으로 나오자 그는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며 그 마을로는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르 8,26). 그가 그 동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예수님도 그를 치유하실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피정은 시끄러운 곳 혹은 일상을 떠나 고요한 곳으로 감이다. 세상과 일상에서 한 발작 뒤로 물러나야 자기 자신과 생활을 잘 볼 수 있다. 세상 속에 살면 아무래도 세상의 법대로 살게 된다. 세상의 법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주님의 법은 때론 그것과 대립한다. 그 속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것이 거기서 뒤로 한 발 물러나면 보인다. 시끄러운 곳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피정만 하며 살 수는 없다. 남의 탓과 비난만 하며 세상에서 도망치는 인생을 살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등진 사람이 아니라 그 안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한다. 어떻게 하면 도망가지 않고 세상 속에서 한 발작 물러나 나와 세상을 볼 수 있을까? 시끄러운 세상 한 복판에서도 마음 한 구석에 광야를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가끔 혹은 정기적으로 그곳으로 물러나 있는 것이다. 그곳은 황량한 곳이 아니라 하느님께만 의지해야 하는 매우 은밀하고 특별한 곳이다. 하느님과 단 둘만 있지만 너무 가까이 계셔서 그분이 옆에 계신지도 알 수 없는 곳이다. 나에게 집중하지 않고 내 옆에 그리고 내 안에 계신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드리며 그분의 마음과 눈으로 나와 세상을 바라본다.

 

예수님, 이렇게 복잡한 세상살이를 어떻게 그렇게 깊은 확신을 갖고 사셨습니까? 흐트러지지 않고 초지일관 고집스럽게 보일 정도로 한 길로만 가셨습니까? 회피도 전쟁도 아닌 평화 속에서 주님의 길을 따르게 이끌어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길의 인도자이시니 아드님의 마음, 하느님 뜻에 대한 깊은 확신을 갖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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