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0일(성 예로니모 기념일) 하느님께로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욥 9,2)” 욥이 친구에게 한 말이다. 그다음에 이어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하는 그의 고백을 보면 왜 하느님이 욥을 그토록 사랑스러워하셨는지 알 것 같다(욥 1,8).
일반적으로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갖는 정서는 두려움이다. 자신의 죄스러움 때문이다. 그 두려움은 포악하고 무자비한 군주의 심판대에 서거나, 생전 처음 치르는 아주 중요한 시험시간 같은 느낌이다. 웅장한 대자연에 앞에서 없는 거나 같은 자신을 발견하거나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눈물을 흘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벌에 대한 두려움이고 동시에 너무 크고 높은 존재 앞에 느끼는 지극한 공경이다.
성당 안에서는 교우가 아니어도 떠들지 않는다. 특히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더 조심한다. 단순한 수도복을 입고 어두운 곳에서 기도하는 수도승의 모습은 그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에 새로운 세상을 말한다, 여기가 전부가 아니라고. 대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하느님을 찾는 한 사람의 모습은 거룩함을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그보다는 허리가 굽은 한 할머니가 나무토막 같은 손가락으로 자식들 주려고 실한 콩들을 추려내는 모습이 더 거룩하다. 대자연과 수도승에게는 다가갈 수 없지만 그 할머니에게는 다가가 그 손을 잡아보고 싶을 것이다. 만일 그의 자녀라면 속상해서 화를 내며 어머니를 꼭 안을 것이다.
욥은 예수님을 몰랐다. 욥은 하느님을 경외했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 그는 감히 하느님께 가까이 갈 생각을 못 했겠지만 우리는 두려우면서도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려고 한다. 예수님이 그렇게 해주셨다.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거다. 그런데 하느님은 외아들을 내어주셨으니 그런 사랑은 세상에 없다. 이것이 우리가 두려우면서도 그분께 가까이 가려는 이유다.
예수님, 제가 이런 줄 그때 알았더라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습니다. 부족한 게 아니라 부당합니다. 게다가 별 쓸모도 없습니다. 그런 줄 잘 알면서도 이렇게 사는 이유는 오직 하나,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자비에만 희망을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저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저의 죄스러움보다는 하느님의 사랑을 더 많이 자주 묵상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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