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이종훈] 12월 5일(첫 토요일 성모신심) 임마누엘 하느님(+ mp3)

12월 5일(첫 토요일 성모신심) 임마누엘 하느님

 

나자렛 사람 마리아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시다. 이 교리는 마리아님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 어머니로서 우월한 지위를 지녔다는 뜻이 아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똑같이 사람이 되셨다는 뜻이다. 엄마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시지 않았다. 우리처럼 엄마의 배 안에서 생을 시작하셨다. 유산과 출산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느님은 철저히 우리처럼 되셨다. 2백 년도 아니고 2천 년 전 의술과 위생을 감안하면 하느님이 얼마나 철저히 우리 중의 하나가 되려고 하셨는지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아무리 친하고 가까워도 어머니와 태아처럼 가까울 수는 없다. 거의 열 달을 한 몸에서 살고, 그 이후에도 몇 년 동안 두 사람은 24시간 붙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느님은 철저하게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예수님의 수태와 탄생 그리고 활동과 죽음까지 그분의 삶 전체는 우리 하느님은 임마누엘이라고 세상에 선포한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3).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분은 그냥 우두커니 서 있거나 혹은 빈둥빈둥 기웃기웃하시지 않는다. 그건 손님이나 낯선 이의 모습이다. 그분은 그것이 가족이든, 본당이나 수도회든 우리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일하신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언제나 움직이시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신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우리가 어떤 특권과 특혜를 받은 게 아니다. 그건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 그리고 그분을 따랐던 사람들의 인생이 어땠는지 생각하면 바로 알 수 있다. 더 많이 봉사하고 희생하는 게 특권이라면 특권이고, 용서하는 사랑의 은총이 특혜라면 특혜일 수 있겠다.

 

성모님은 여신이 아니다. 그래서 성모상은 자모상일 때, 아드님과 함께 있는 모습일 때 완전하다. 어느 노사제는 성당에 십자가 대신 자모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라 좀 당황했지만 다시 잘 생각해보면 그분의 주장이 얼토당토하지는 않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 구원을 위한 것이고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라지만 솔직히 그 모습 자체에서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반면에 엄마는 그 말만으로도 감동이다. 예수님도 그걸 아셨다. 그리고 당신의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아셨을 테니 당신의 생의 끝자락에서 그분이 우리들을 보호하고 양육하며 인도하시는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요한 19,26-27). 그래서 우리는 엄마를 부르는 그 감동과 고마움으로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만난다. 이런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사시니 우리는 못 할게 없고 견디지 못할 게 없다.

 

예수님, 주님이 하늘에만 계셨으면 성모님은 없었습니다. 성모님이 계시니 저희는 하느님을 부르고 청하는 게 아주 편합니다. 때론 성모님께 청하지만 말만 그렇지 마음은 하느님을 향하고 있다는 걸 잘 아십니다. 고맙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는 예수님을 가슴에 폭 안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을 우리에게 소개시켜주거나 내어주시려는 자세입니다. 이콘의 네 인물 중 가장 크게 그려졌지만 어머니는 주인공이 아니라 아드님이 더욱 잘 드러나게 그 배경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을 알겠습니다. 저희를 아드님께로 인도해주소서. 아멘.

 

 

성경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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