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이종훈] 나해 2월 7일(연중 제5주일) 신적인 우정(+MP3)

나해 2월 7일(연중 제5주일) 신적인 우정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합격, 우승, 완치 등의 소식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그런데 그런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다. 하루 이틀이면 다 사라진다. 휘발유 같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수고, 걱정, 오해, 다툼, 상처를 주고받는 일들을 계속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건 모두 불쌍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 독서로 듣는 욥의 고백과 기도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움직일 거로 생각한다(욥 7,1-7).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좋은 소식이 주는 기쁨은 휘발적이라서 잠시 귀만 즐겁게 해주지만 이런 소식은 안도감과 평화와 함께 마음을 온화하게 해준다. “나는 나만 그런 줄 알았지. 너도 그렇구나. 다들 그렇게 사는구나.” 이건 사실이다. 다들 그러고 사는 것 같다. 명성을 얻는 사람들이나 부자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개인사에 관해서는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다. 홀로 있는 어두운 밤이 되면 근거 없는 불안과 미래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들로 말 그대로 어두운 시간을 보낸다.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이 세상 사람들에 이런 소식이었으면 좋겠다. 강압적이거나 교조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실 교리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추상적이고 때로는 위협적으로 들릴 수 있다. 우리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다. 임신 방식과 죄만 빼고는 우리와 철저히 같아지셨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이 딱한 사정을 잘 아신다(히브 4,15). 그러면서도 그분은 “거룩하고 순수하고 순결하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히브 7,26)”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절친이라고 부를 수 있고 동시에 구세주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일하고, 아프고, 슬퍼하고, 화내고, 걱정하고, 유혹받고, 괴로워하셨다. 하지만 죽게 되어도 하느님의 뜻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분 덕에 우리는 희망을 품게 됐다. 우리를 구원하는 게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참된 대사제셨다. 그렇다고 그분은 성전에 살지 않으셨지만, 성전을 떠난 적이 없으셨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바로 성전이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성당이셨다.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에게 마음을 열어 친근하게 대화하는 시간이 나에게 곧 성당이 된다. 부모,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것도 말할 수 있다. 고해소에서 제대로 고백하지 못하는 것도 그분 앞에서는 있는 그대로 다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그분은 ‘왜 그랬어?’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랬구나. 힘들었겠네. 밥은 먹었고?’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하느님은 이보다 더 좋은 분이실 텐데 표현할 방법을 못 찾겠다. 이분을 믿는다면 좋아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더는 불쌍하지 않고 어둡지 않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주님, 하느님이고 단 하나의 스승이며 절친이십니다. 주님은 친구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 저를 잡아 일으키시니 저를 괴롭히고 혼란스럽게 했던 못된 것들이 저를 버리고 달아납니다(마르 1,31).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과 친구가 되게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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