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이종훈] 나해 4월 29일 사랑(+ MP3)

나해 4월 29일 사랑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고 지킬 수 없는 계명 같다. 그런데 하느님이 참 좋은 분이고 외아들까지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는다면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할 일은 아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오래전에 아셨다. 오천 명을 먹이신 의 기적을 일으키신 다음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요한 6,63-64). 그리고 마지막 만찬에서 유다의 발도 씻어주셨다. 그의 발도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유다의 마음에 악의 씨앗을 뿌려놓으신 게 아니다. 그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치신 것을 보면 마음을 바꾸고 복음을 믿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몫이다. 하느님도 하실 수 없는 일이다. 유다는 완전히 깨끗해진 몸으로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온몸의 피를 빼내 정화해서 다시 넣어도 바뀌지 않는다. 모든 신경을 뽑아 새로운 것을 넣고 기억을 다 지운다면 혹시 모르겠다.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대신 자신을 알아간다. 이 사람은 좋지만 저 사람은 싫고, 이 일은 재밌지만 저 일은 귀찮아한다는 것을 안다. 안다고 바뀌지 않는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처럼 유다를 좋아하셨을 것 같지 않다. 그의 발을 씻어줄 때의 주님 마음을 상상한다. 그 마음이 애틋한 마음이었다면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다. 그의 발에 손을 대는 것조차 소름 끼치는 일이었을 거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발을 씻는 일을 해내셨다. 사랑은 감정을 지나 의지의 영역 안에 있다. 그리고 더 깊은 곳 나의 영 안에 있다고 믿는다. ‘좋고 싫고’가 아니라 ‘하느냐 마느냐’가 사랑이다. 싫어도 하고, 좋아해도 하지 않는 게 사랑이다. 잘 하지는 못해도 그렇게 따라 할 수는 있다. 나는 싫지만 주님이 원하시니까 그렇게 한다. 그게 나의 하느님 사랑이다.

 

주님, 좋아하면 사랑하기 쉽지만 아무리 사랑해도 싫은 건 싫습니다. 마지막 날까지 그럴 것 같습니다. 그가 좋아지게 되면 다행이지만 싫어도 사랑합니다. 그의 발도 씻어 줍니다. 이유는 단 하나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랑에는 이유 같은 건 없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의 계명을 더 잘 지킬 수 있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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