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8월 16일 신뢰와 사랑
어제 친한 외국인 형제가 성모님과 함께 하늘나라로 갔다. 8월 들어 벌써 네 번째 접하는 지인의 죽음이다. 천수를 누리신 친척 어른, 도둑맞은 것 같이 돌아가신 고마운 분,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은 죽음 그리고 먼저 왔다고 먼저 떠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해 준 죽음이다. 죽음에는 일정한 공식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은 내 곁에 있고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 내가 원해서 세상에 나온 게 아니듯 죽음도 마찬가지다. 생의 시작과 끝이 하느님 손에 달려 있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여전히 반갑지 않고 무섭다. 증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어쩌면 이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려고 열심히 사는 걸지 모르겠다. 건강하고 부자가 되면 죽음을 잊어버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 같다. 아니면 하느님의 법정에 당당하게 서기 위해서일까? 그런 의도 안에도 두려움이 서려 있다. 심판대에 서는 건 설레거나 유쾌한 일은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그 부자는 하느님의 계명을 열심히 지키며 착실하게 살았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어떤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갈증 또는 불안일 거다. 그것이 갈증이었다면 예수님의 대답,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오라는 초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용기를 냈을 것이다. 그런데 슬퍼하며 돌아간 걸 보니 아마 불안이었던 것 같다. 나의 마지막 날과 심판대에 서는 두려움 같은 것이었나 보다.
예수님은 때가 차자 집을 나와 떠돌이 생활을 하셨다. 사람은 모으셨지만, 상징적인 열둘만 부르셨고 권력은 물론 재산도 갖지 않으셨다. 그분이 그렇게 사셨던 것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빠 아버지 하느님께 목숨까지 맡기셨다. 죽기까지 신뢰하셨고 그만큼 사랑하셨다. 예수님께 삶은 불안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신뢰와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분도 유혹을 받고 결정적인 순간에 흔들리셨다. 인간은 유혹받는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인간 예수님도 그러셨지만, 아버지께 대한 신뢰로 유혹을 물리치셨고 완전해지셨다. 부유함과 가난함, 성공과 실패, 안락함과 고단함은 신앙과 별로 상관없어 보인다. 죽음의 일정한 공식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세상을 당신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다스린다는 뜻은 아니다. 그분은 정의롭고 공정하시다. 죽음의 공식을 포함해서 그분의 정의와 공정은 주님을 뵙는 날에야 비로소 완전히 알게 될 거다. 그때까지 하느님을 계속 신뢰하고 더 많이 사랑한다.
예수님, 세상이 변해서 요즘은 예수님처럼은 살 수 없다는 주장이 핑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떠돌이 나그네 생활을 할 수는 없지만 제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너저분한 것들을 내다 버릴 수는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했으므로 만족할 수 있게 해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하늘나라를 차지하도록 제가 더 가난해지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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