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이종훈] 나해 9월 2일 짐(+MP3)

나해 9월 2일 짐

사람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여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났다. 인생은 하느님을 찾아가는 긴 영적 여행이고 순례다. 순례의 끝은 언제나 평화와 기쁨인데 인생 순례의 끝은 그다지 기다려지지 않는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얼굴을 맞대고 만남이 두려운 탓일 거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이 땅에서 순례의 목적지를 발견했다. 메시아 그리스도 하느님을 직접 뵈었다. 예수님은 어떠셨는지 모르지만 한눈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 대신 그의 언행을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한다.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힌 물고기를 보고 겁에 질려 예수님께 말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예수님 설교를 이미 들었던 터라 처음에는 그분을 존경과 공경의 의미로 ‘스승님(루카 5,5)’이라고 불렀지만, 기적을 체험하고는 ‘주님’이라고 불렀다. 사실 이사야 예언자도 처음 주님을 뵈었을 때 이렇게 고백했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베드로의 그 고백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려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따른다면서도 그분을 직접 만나는 건 두렵다. 하느님이 무서운 분이 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스러움 때문이다. 죄 없는 하루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이루어진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 그리고 고해성사의 은총을 믿는다면서도 여전히 그 만남은 반갑지 않고 꺼려진다.

어쩌면 하느님이 살아계신다는 고백보다는 나는 죄인이라는 고백이 더 진실할 거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와 다른 동료들을 그 자리에서 초대하셨다. 그들이 죄스럽다는 것을 알고 부르셨다. 천사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이사야의 더러운 입술에 대서 그를 깨끗하게 했다면(이사 6,6-7),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리고 성찬례 안에서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지시고 살라버려 아무도 찾을 수 없게 하신다. 속죄가 아니라 믿음으로 용서받고 깨끗해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도 모두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귀찮아도 이 순례를 마치는 날까지 그것을 짊어질 수밖에 없다. 죄는 무겁지만, 그 성향은 짊어질 만하다. 내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붙어있으니 말이다.

예수님, 주님을 친근하게 부르라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저도 주님을 진짜 뵙는 게 두렵습니다. 도저히 짊어질 수 없는 죄들의 무게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사람이고 또 그럴 사람인 줄 아시면서도 저를 부르셨다는 걸 알았습니다. 십자가 죽음의 불로 제 더러움을 모두 태워주셔서 제 본성대로 살지 않고 주님 계명을 따라 살게 하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하느님이 인간의 손에 처형되는 것까지 지켜보셨으니 어머니가 품지 못할 죄인은 없습니다. 그 품에서 제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 죄를 없애시는 아드님을 만납니다. 끝까지 어머니 손을 놓지 않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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