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이종훈] 나해 11월 8일 용서보다 인내(+MP3)

나해 11월 8일 용서보다 인내

세상과 떨어져 혼자 살지 않는 한 이웃과의 마찰 다툼 갈등 미움 등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혼자 살면 그런 것들에서는 벗어나겠지만 그렇다고 죄의 유혹까지 없어지지는 않는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다. 이 육체를 입고 있는 한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사는 한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를 언제나 용서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용서한다. 나는 원하지 않지만, 하느님이 원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용서해야 하는 줄 안다. 성인군자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만이 미움의 고통과 증오의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임을 잘 알기 때문에 참 괴롭다. 용서해야 하는데 잘 안 되고 그러고 싶지 않다. 나도 용서받아야 하는 줄 알면서도 이웃을 용서하는 데는 참 인색하다.

그런데 우리의 고통은 용서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가 나에게 용서를 청하지 않는 데에 있다. 그는 왜 나에게 용서해달라고 하지 않을까? 청하면 내가 일흔일곱 번까지는 못해도 서너 번 정도는 멋지게 용서할 수 있을 텐데. 그러고 보면 그는 그 때문에 내가 화나고 아픈 줄 모르는 거다. 잘못한 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닐 거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풀려고 대화하면 싸움이 되고 더 나빠지기도 한다. 다름을 잘못이라고 하고 나는 나대로 사는 데 나 때문에 아프다고 하니까 말이다.

우리는 용서한다고 말하고 속으로는 인내한다. 그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그것이 안 되면 그냥 참는다. 이게 다 이웃사랑이다. 좋아죽어야 사랑이 아니다. 죽을 만큼 참는 것이 사랑이다. 다 한번,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는 것은 하느님이 원하고 그래야 하느님처럼 되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 45).” 아버지를 닮은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마태 5, 44). 이렇게 완전하게 돼야 우리는 하느님을 동등하게 참되게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처럼 바뀔 수 있다.

예수님, 저는 주님처럼 할 수 없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원하고 그래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기뻐하신다니 인내하고 용서하고 사랑합니다. 제가 그러기로 결심하고 은총을 청하면 당장 주님의 영이 제 안으로 들이닥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콘 속의 어머니는 수난과 죽음의 분위기 안에서 저희를 아드님께로 인도하십니다. 상처와 억울함은 싫지만, 그것들 덕분에 아드님과 더욱 가까워집니다. 벌컥벌컥 화내지 말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차분하게 잘 생각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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