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12월 24일 하느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려면
즈카르야는 수개월 간의 고요와 침묵 속에서 나오자마자 이렇게 노래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루카 1, 68-69).” 그의 고요와 침묵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벌이 아니라 하느님이 어떤 약속을 하셨는지 기억해내고 그리고 어떻게 그 약속을 지키시는지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라는 뜻이었다.
일상생활이 수개월간 불편해진 게 벌이라면 벌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인류구원역사 안으로 실제로 들어가기 위해 치러야 할 작은 대가라고 해두자. 일상이 바뀌면 좀 불편하지만 금방 익숙해지니 대가라고 부를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현존과 구원을 체험하는 데 그 정도는 기꺼이 지불할 만하다.
속량(贖良)은 누군가 대가를 지불하고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준다는 뜻이다. 우리가 죄의 노예라는 말을 듣기 싫겠지만 그 죄만 반복해서 짓고 또 아프고 저주스럽게 싫어하면서도 그렇게 하는데 어떻게 노예가 아니라고 주장하겠나. 인정하든 안 하든, 믿든 안 믿든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셨다. 거기에 내가 기여한 것은 없다. 일상이 조금 불편해지는 걸 감내하는 게 기여라면 기여다. 늘 그렇게 하던 걸 안 하거나, 새로운 것과 그동안 잊었던 것을 서툴고 어색하게 시작하는 거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다. 하느님께 협조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체험하게 한다. 나를 노예로 부리는 죄를 없애시고 그것이 내 안에서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거다. 나의 침묵은 속량하시는 하느님이 드러나는 시간이고 그 자리다. 즈카르야의 불신을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하느님이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셨다. 즈카르야는 아기의 탄생을 보고서 하느님을 찬미했지만,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증언만 듣고 온 영혼으로 찬미의 노래를 불렀다. 즈카르야에게 침묵의 시간은 믿음을 위한 선물이었다. 마리아의 믿음은 내가 따라야 할 모범이다. 하느님의 구원을 보려면 침묵하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믿어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이 토마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예수님, 믿음은 저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 1). 사실 주님은 제가 믿게 하시려고 안 하신 일이 없습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하느님을 더 신뢰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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