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김대열] 2013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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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8월24일 연중 제20주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토요일 복음묵상

 

“와서 보시오.” (요한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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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이 맞는다면, 1980년도 중반에 서울 혜화동 성당에 “와서 보라”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던 것을 기억한다.

모르긴 해도, 예비자 모집 기간 중 걸려있던 것으로 짐작한다.

내가 지금도 그 때의 일을 기억하는 것을 보면 “와서 보라”는 짧은 네 글자가 강한 인상을 남겼음에 틀림없다.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가던 수많은 차량 속의 사람들이나, 길을 걷던 이들의 눈에 저절로 들어오는 문장이었을 것이다.

 

“와서 보라”는 말은 그만큼 보일 것에 대해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 모두는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을 받고 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장 전제되어야 할 것은 당연히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모범적인 삶이다.

분명,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아름다운 삶이 가장 큰 선교적 효과를 낼 것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고 싶다.

가끔 이렇게 말하는 신자들이 적지 않다.

자신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주제에 남에게 신앙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가당치 않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겸손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에는 커다란 오해가 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필립보가 나중에 제자로 합류한 ‘바르톨로메오’라고 추정되는 나타나엘에게 의도적으로 한 말, “와서 보시오” 라는 말의 전후 문맥을 이해해야 한다.

 

무엇을 보라고 한 것인가?

자신들의 사는 모습을 보라고 한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부족한 모습을 보고 판단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겪은 예수님을 직접 와서 만나보고 판단하라는 이야기였다.

결국 나타나엘은 제자의 무리에 합류한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완벽할 수는 없다.

당연한 일이다.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허술하고 부족한 모습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이다.

그리스도를 전할 정도의 충분한 모범적 삶은 우리에게 애당초 허락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필립보가 와서 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 모두는 말씀을 전하는 그분의 제자들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최선을 다해야 함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부족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부족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우리이기에, 더욱 더 그분을 모르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진심을 담은 우리의 한 마디, “와서 보라”가 누군가에게 전해져 그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복음선포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태도가 우리 자신의 삶도 복음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자신의 완벽한 모습을 보이면서 예수님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은 교만이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내 비록 제대로 못살고 있지만, 그래도 그분을 따르려 애쓰고 있네. 그러니 자네도 한 번 그분을 만나보시게.”

이것이 선교임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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