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김대열] 2013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486f030438b6092a0fef05e50cb1bf80_1493279496_3984.jpg 

2013년11월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토요일 복음묵상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루카2,16)

 

예수께서 화를 내신다.

그분의 화난 모습은 사실 지금껏 보여주셨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늘 우리의 상식을 넘는 사랑을 외치던 분이셨다.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벗어주라는, 왼 뼘을 때리면 오른 뼘을 내밀라는, 오 리를 가자면 십 리를 가주라는 그분의 말씀은 무저항을 넘어선 그 어떤 것이었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라는 적극적인 사랑이었다.

 

그러던 분이 예상치 못한 분노를 터뜨리고 계신다.

성전을 시장 터로 만든 이들에게 폭력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채찍을 휘두르신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기야 분노를 폭발하시는 그분의 모습이 오히려 우리의 상식과 근사치를 이루는 듯 해서 그 인간적인 모습에 속이 다 시원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가르침과는 좀 동떨어진 모습이 아닌가?

왜 그렇게 화를 내셨을까?

그렇게 관대하셨던 분을 무엇이 그토록 화를 내게 만들었을까?

원수마저도 사랑하라 하시던 그분께서 왜 이토록 화를 내시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절대로 넘어서서는 안 되는 선을 알고 계셨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셨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 하신 그분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 하느님에 대한 열정을 거스르는 죄는 그분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착각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그분의 분노는 인간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사랑하는 인간에 대한 절규였다.

당신이 사랑하는 인간들, 죽음을 담보로 내맡길 정도로 사랑하는 인간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져버리는 그 아픔을 모르는 척 하실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분의 분노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는 선상에서 이해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인간들은 어처구니 없이 그러한 예수님을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으로 고발했고 십자가에 못박았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신다. 하느님의 몸을 모신다. 이로써 우리 역시 하나의 성전이 된다.

생각해보자.

자신을 하느님의 또 다른 성전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삶인가?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방법을 찾는 삶인가?

스스로를 주님을 모시는 성전으로서 합당한 모습이 되려고 노력하는 삶인가?

그렇다 할 이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우리의 모습은 당연한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의식해야 한다.

나는 나의 소유물이기 전에 그분의 것이라는 것을 의식해야만 한다.

늘 하는 말이지만 언젠가 그분께 온전히 돌려 드려야 하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보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스스로를 함부로 대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자신에 대한 올바른 사랑은 타인에 대한 올바른 사랑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랑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성전들이 장사치들에 의해 범해지고 있다.

그 성전 마당들에는 울분을 터뜨리시는 예수님의 분노가 있다.

먼저 나에게 주어진 작은 성전, 작은 마음부터 가꾸어야 한다.

기도가 호흡처럼 살아 움직이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오던 소리를 기억하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임을 확신한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