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11월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복음묵상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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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성서를 열고 해당 복음말씀을 묵상한다.
초라하다 못해 비참해 보이는 삼라만상의 왕이신 그리스도.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왕의 모습이 이런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세 가지의 부르심 즉 왕직, 사제직, 예언직에 참여해야 함을 배워왔다.
오늘은 물론 왕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각자의 왕직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참된 그리스도교적 왕의 의미는 수없이 이야기 되어왔다.
단 한 가지만 기억하자. 섬기는 일이다.
그분께서 그리도 강조하셨던 왕다운 모습이란 결국 섬기는 모습이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왠지 모르지만,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자꾸 눈에 들어오는 대상은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아니다.
함께 십자가에 죽음을 맞이한 두 죄인의 모습이다.
한 사람은 예수를 저주하고 조롱한다. 욕설을 퍼붓는다.
다른 한 사람은 저주를 퍼붓는 이를 나무라면서 예수님께 자신을 부탁한다.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은 두 사람이 강도라고 전하고 있고, 오늘 우리가 주일복음으로 대하고 있는 루카 복음서의 내용과는 달리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을 모욕하였다고 전한다. 물론 요한 복음서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당한 두 사람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교회전승은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보다는 루카 복음서를 선택한 느낌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두 사람 중 오른 쪽에 있었던 사람(右盜)이 회개한 사람이고 왼쪽에 있었던 사람(左盜)이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예수님을 저주한 사람이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도 있다. 사실 역사성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보다 개연적일 것이라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실 때 그 양쪽에는 두 사람의 죄수들이 있었다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상상의 나래를 펴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누가 보아도 처참한 마무리를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의 삶 모두 상처투성이가 아니었을까?
한 사람은 상처로 시작해서 상처로 끝을 맺는 것이고,
한 사람은 마지막에 상처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은총을 입는다.
얼마나 고단한 삶들이었을까?
그들의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까?
죽음에 대한 명분이라도 그럴 듯 했으면 슬픔이 조금이라도 희석이라도 되었을 텐데…….
죽는 순간까지 이 두 사람의 몰골은 인간쓰레기로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앞 둔 세 인물의 거래는 십자가 위해서 진행된다.
한 사람은 모든 것을 저주하며 어둠으로 끝날 것을 선택하고,
한 사람은 해방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그에 대한 보증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몰골이 말이 아닌 예수라는 인물이 서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 싶다.
하나는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선택이라는 유한성에 대해서이다.
먼저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두 사람의 삶이 비슷한 처지였을지 몰라도 마지막 선택하는 모습을 보면, 두 사람이 이해한 각자의 삶에는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를 짐작해본다.
하루아침에 회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회개라는 것은 두려움이 아닌 사랑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죄에 늘 넘어지는 삶이지만 이 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이 평상시 회개한 강도에게 있지 않았었을까?
반대로 예수님을 죽는 순간까지 모욕했던 강도는 자신이 걸어왔던 삶 자체가 어둠이었고, 그 어둠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그저 상처에 머문 인생이 아니었을까?
한 가지를 기억하도록 하자.
우리가 미래를 생각하고자 할 때는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현재를 잘 가꾸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비록 허물투성이고 상처투성이의 모습이라도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늘 열려있을 것이고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회개라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다.
두 번째, 선택은 늘 주어지는 것 같지마는 결국 마지막 선택이 존재한다.
삶 속에서 숱한 선택에 의해 희비가 엇갈리기도 하지만, 그러한 과정 속의 선택은 어쩌면 마지막 선택을 위한 연습일지도 모른다.
루카가 전하는 십자가 위에서 두 강도와 예수님과의 거래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얼마나 찰나적인 선택이었던가?
다시 첫 번째 이야기의 내용과 연결이 된다.
마지막 선택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평상시의 자신의 마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 이는 주사위 놀이가 아닌 분명 선택이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을 우리는 희망하지 않는다.
마지막 선택을 위한 준비는 이 순간에도 이루어져야 함을 생각했으면 한다.
오늘 이야기는 쉽지가 않다.
글을 써내려 가면서도 제대로 전달이 될까 망설여진다.
하지만 여러분께서 잘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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