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김대열] 2014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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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1월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축일) 복음묵상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코 16,15)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하십니다.

‘모든 피조물’이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피조물이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인간만이 아닌 모든 피조물에 복음을 선포하라 하십니다.

요즈음 자연의 질서가 우리 예상하고 엇나가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온난화, 지진과 해일, 폭설과 폭우, 사막화와 냉해, 폭염과 한파, 기근 등등.

자연이 우리에게 베풀었던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너무 이기적으로 인간 중심의 역사였습니다.

자연파괴의 역사였고 인간 아닌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존재 가치를 부여 받았던 역사였습니다.

철저하게 인간에 의해 희생되고 소외된 자연의 역사였던 것이지요.

 

공생하지 않으면 끝이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생각해봅니다.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자연과 그 안에 사는 모든 생명체들과 사물과도 복음적인 관계를 이루어야 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오늘은 사도 바오로의 회심 축일입니다.

 

우리에게는 바오로처럼 확실하게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늘 회개의 기회를 만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가 버릴 뿐이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늘 민감한 감각을 가지고 복음이라는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길바닥을 비집고 나온 풀 한 포기를,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들을, 살갗에 와 닿는 온갖 종류의 바람들을, 폐지를 담은 손수레를 끌고 힘겹게 횡단보도를 건너고 계신 허리 굽은 할머니들의 모습을, 길거리에 누워 잠을 청해야 하는 이들을,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는 강아지나 고양이들을, 여러 경로를 통해서 소개되는 슬픈 이야기들을 마음으로 보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좋은 것만 보고 살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 드는 이들하고만 살 수도 없습니다.

좀더 섬세하고 민감한 눈으로 내가 만나는 모든 것이 말하고 있는 뜻을 헤아리려 해야 합니다. 그 안에 가장 올바른 그분의 뜻이 발견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안에는 반드시 우리의 회심을 부르는 무엇인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회개라는 말을 묵상해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 이외에는, 완전한 회개란 허락되지 않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회개를 하고 고해성사를 보았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 고해성사가 진실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 사람이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또 다른 죄를 무궁무진하게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읽어보면, 바오로가 회심을 한 후에도 얼마나 많은 갈등 속에 살아야만 했는지, 얼마나 많은 회개의 체험을 하면서 살아야 했는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완벽한 회개는 세상을 마무리할 시기 이외에는 불가능하다라는 말이 슬프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끈기 있는 사랑이 있음에 우리는 이 한계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가 자연스럽게 주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되나 봅니다.

 

자신을 너무 책망하지 마십시오.

죄를 지었으면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죄의 연속적이고 반복적인 태도를 합리화시켜서도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싸움, 그리고 그분께 의탁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자기 작업 속에서, 전보다는 나아진 자신의 모습이 발견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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