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4월27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복음묵상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요한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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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앙을 상징하는 구절로서 오랜 동안 교회 안에서 사용되던 사도 토마스의 말임을 우리는 압니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사도 토마스의 태도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사실 제자들은 성령강림 체험이 있기까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확실한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두려움에 쌓여 혼돈에 빠져있을 때, 가장 용기 있게 확실한 방법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고자 했던 이가 토마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께 야단을 맞는 장본인이 되었지만, 제일 먼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Dominus meus et Deus meus!)” (요한20,28)을 고백한 이는 토마스였습니다.
과연 우리라면 어떠했을까요?
다른 열 제자와 같은 태도를 보였을 수도 있고, 충분히 토마스와 같은 태도를 보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현장에 없었고, 그저 다른 동료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로 아무런 의심도 없이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보지 않고도 옳은 것만 믿을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사도 토마스는 보통의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제자들의 모습들 역시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 삶을 다하는 날까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진위를 따지고자 하는 마음은 죄가 아닙니다.
그럴까 그렇지 않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지적 동물의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오히려 말도 안 되는 듯한 이야기에 속아서 사이비 종교에 주저함 없이 빠져드는 이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자신의 성격이나 성향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성격을 어떻게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아가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느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 맞는 방법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자신의 성격에 백 퍼센트 만족할 이는 세상에 없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고 청하는 마음으로 그분 안에 머물고자 할 때, 우리의 단점이나 약점은 오히려 하느님을 보다 더 잘 체험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토마스 사도가 순교의 관을 쓰기까지의 신앙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자기싸움과 갈등과 번민이 있었을까를 짐작해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묵상해봅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고린토2서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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