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김대열] 2015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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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1월13일 연중 제 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르코1,24)

 

우리가 잘 쓰는 말 중에 ‘상관없다’ 혹은 ‘상관하지 마라’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들은 보통 안 좋은 일에 잘 사용하는 말입니다. 안 좋은 일에 연루되기 싫은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 중에 나와 상관 없는 일은 없을 듯싶습니다. 먼 나라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도, 내 나라, 내 이웃, 내 친구에게서 일어난 좋고 나쁨을 떠난 그 어떤 일도 넓은 의미로 모두 상관 있는 일입니다.

세상이 너무도 이기적이 되고, 개인주의적이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겨울철이 되어 눈이 쏟아지면 골절상을 입는 노인들이 늘어만 간다고 합니다. 집 앞에 쌓이는 눈을 치우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이야기지요. 독거노인들의 고독사(孤獨死)에 관한 이야기도 자주 듣게 됩니다. 이 모두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의식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라 안팎을 시끄럽게 했던 어처구니 없는 민항기 회항사건을 보더라도, 학교 등록금을 모으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 학생의 인권을 짓밟은 돈 많은 여자의 횡포를 보아도 이 세상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갑(甲)질’이라는 신생어가 일반화되어 가고 있는 대한민국입니다.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가 기사화되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특별법이 발의되었지만, 그 이후에 대해서는 전혀 소식이 없습니다. 이야기를 꺼내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습니다. 분명 어떤 혁신적인 세상의 변화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오지랖이 넓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 말입니다. 이것 저것 참견이나 간섭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지요. 저는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오지랖이 넓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관심이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세상의 어떤 부정이나 부조리가 쉽게 일어날 수 없도록, 보다 많은 사람들이 오지랖 넓게 움직이는 마음을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복음적 정신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크게 위배되는 죄입니다. 세상의 아픔에, 세상의 기쁨에 민감해야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하늘나라만 바라보면서 세상의 일에 무관심한 이들에게 허락되는 것이 천국이라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런 고통을 당하실 이유는 없었습니다.

 

상관해야 합니다. 피곤하고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상관해야 합니다. 기쁜 일에는 함께 감동하고 기쁨을 표현해야 하고, 슬픈 일에는 함께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옳지 못한 일에는 옳지 못하다는 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서로가 상관 없는 인간 사회는 없습니다. 특히 복음적인 눈으로 본다면, 모두가 하느님의 백성인데 어찌 상관없다 할 수 있겠나요?

 

나쁜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예수님께 상관하지 말라는 말을 쏟아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있는 나쁜 영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자신을 내버려두라고 발악을 하는 모습입니다. 악한 영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똑 같은 말로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상관 말라고, 방해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기적 무관심으로 누군가의 아픔을 외면한다면, 누군가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동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악의 말에 따르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복음적 관심에서 시작되고 발휘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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