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김대열] 2015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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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2월13일 연중 제 5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코7,37)

 

어제 저녁에, 어이 없는 일로 세간을 시끄럽게 했던 모항공사 전 부사장의 공판과정을 이야기 해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녀의 반성문 6통에 대한 요약도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구치소에서 수감자들과 함께 나눈 생활에 대해서도 소회한 듯 합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참으로 심경이 복잡해집니다.

하도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이니, 그 어떤 반성들이나 용서를 청하는 말들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삶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이들까지 그 마음이 전달되지 못하는 또 다른 아픔을 체험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는 용서를 받아야 할 자의 문제인지, 용서를 해야 할 자의 문제인지를 식별할 수 없게 하는 혼돈을 안겨줍니다.

하여 참으로 판단하기 쉽지 않은 삶 속에 불신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차라리 모두가 상처 속에서 산다고 하는 것이 옳은 이해이자 분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실을 듣고 진실을 볼 수 있는 우리이기를 희망해야 합니다.

비록 어려운 상황이라 해도, 희망하는 자에게만 가능성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저의 페이스 북 담벼락에 올린 글이 떠오릅니다.

“진실한 사과는 세 가지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미안하다.’ ‘내 잘못이다. ‘올바로 돌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A sincere apology has three parts: “I am sorry’.” “It is my fault.” “What can I do to make it right?”)

 

‘미안해 하는 마음’, ‘잘못을 인정하는 마음’, ‘책임을 지려는 마음’

어떤 뉘우침이든 그 뉘우침이 진실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마음이 무엇보다도 전제 되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사과를 하는 인간들은 많지만, 그 사과가 진실해 보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예수님께 청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지혜는 진실을 듣고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용서를 청해야 할 자이든, 용서를 해야 할 자이든 이런 귀와 눈이 없는 한 우리는 결국 거짓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반성과 용서가 가능한 세상을 위해 우리 각자 자신의 삶에서 열심히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주변을 변화시키게 되어있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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