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7일 옳은 일
면담을 요청 받을 때가 있다. 상담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상담은 내담자에게 정답이나 그가 모르는 어떤 묘수를 가르쳐주는 것이 분명 아니다. 그 대신 그가 이미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해답 같은 것을 보여주고 알려주는 도와주는 것이다. 마치 그 앞에 있는 거울과 같다. 그래서인지 내가 그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면 나 또한 의논상대와 상담자를 찾는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7)”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우리를 나무라는 듯이 들린다. 그분에게는 따로 의논상대가 필요 없으셨던 것 같다. 아버지 하느님과 늘 함께 계셔서 그러셨을까? 아니면, 그분이 나무라시는 것처럼 우리는 이미 옳은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데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어느 법전에도 ‘그를 용서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을 것 같다. 법은 의무와 처벌 규정만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용서받고, 또 용서하는 것이니, 법전에서 그것을 찾으려는 노력은 헛수고이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그것이 사실임이 분명하다. 굳이 계명과 법전을 찾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내가 나쁘고 사악해서 그런 일을 즐겨 한 것이 아님도 그것만큼이나 분명하다. 어찌어찌하다보니 그렇게 되어 버렸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 시간 그 자리로 돌아가서 지금 내가 후회하는 대로 모든 것을 옳게 바로 잡아 놓고 싶다. 또 용서하고 싶은데 이유가 뭔지 모르겠지만 잘 되지 않아 괴롭고, 정작 상대방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 보여 더 약 오르고 괴롭다. 그래서 용서하고 싶다. 이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고 또 옳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신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 주님,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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