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11월 24일(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박해자 이기심과 자애심
신앙이 목숨을 담보로 하던 때가 있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작은 이들을 돌보는 것이 권력자들에게 왜 그렇게 두려운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박해는 신앙보다는 그 당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일어났던 것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폭력을 거부하니까 그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손쉬운 먹잇감이었을 거다. 참 슬픈 얘기다.
폭력은 두려움의 표현이라고 한다. 그들은 우리의 신앙이 두려웠던 거다. ‘예수 그리스도’란 말은 우리 신앙의 함축적인 표현이고 고백이다. 용서와 자비, 사랑과 평등을 가르치고 몸소 실천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목숨 바쳐 증언하신 예수님이 구세주 그리스도라고 믿는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 진리이고 우리는 그 진리에만 복종한다. 목숨을 잃게 돼도 그것을 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기회를 진리를 증언하는 때 그리고 하느님을 직접 뵐 수 있는 은총의 시간으로 여긴다. 그러니 폭력은 우리를 일시적으로 움츠러들게는 할 지언 정 신앙을 버리게 할 수는 없다.
하느님의 뜻은 세상의 모든 선한 가치들을 포함하고 그 위에 있다. 그것은 내가 지닌 선하고 의로운 지향보다 당연히 더 높고, 우선한다. 인간은 불완전해서 그가 지닌 선함과 의로움도 또한 그러하다. 내 처지가 이렇지만 그런 지향과 꿈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 실천 그리고 때로는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그런 것들을 포기함을 배우면서 나는 조금씩 더 완전해진다. 우리의 적은 박해자들이 아니라 이기심과 자애심이다.
이기심과 자애심은 나를 폭력적으로 다룬다. 선함과 의로움 그리고 평화와 안전으로 가장하고 나를 지배한다. 나의 뜻, 습관, 계획을 따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이 느끼게 하니 폭력적이다. 예수님은 그 지배자 앞에서 설 때가 주님을 증언하는 시간이고 바로 그때에 당신이 직접 언변과 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어떤 적대자도 맞설 수 없다고 하셨다(루카 21, 15). 그런데 나의 목숨이 걸린 시간이 당신을 증언하는 때라는 말씀이 왠지 서운하고 가혹하게 들린다. 주님은 나의 안위를 돌보지 않으시는 것 같다. 그러실 리가 없는데도 그렇게 느끼는 것, 아직 믿음이 부족한 거다. 어쩌면 아예 믿음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는데 말이다. 머리는 주님을 믿고 마음은 나를 믿는다. 그러니 이웃을 섬기는 게 버겁고 언제나 내심 보상을 바란다.
예수님, 갈 길이 참 멀어 보입니다. 그래도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 못 가면 주님이 달려와 맞아주시리라 믿습니다. 주님을 믿고 신뢰하겠습니다. 은총을 베풀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처럼 바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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